1997년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96년해강도자미술관(海剛陶磁美術館)에서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하여 모두 2기의 가마유적이 확인되었다.
2기의 가마 중 1호가마는 경작과 개간으로 인하여 가마 흔적의 대부분이 유실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남아 있는 가마의 총길이는 12m, 소성실(燒成室)의 내벽 폭 평균 1m, 바닥면 경사도는 11∼13°를 이루고 있었다.
이 가마는 남아 있는 파편 퇴적이 많지 않고 운영 당시 보수를 한 흔적 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단기간 운영되었다가 폐요(廢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마의 내부에서는 고려 말에 활용된 장구 모양의 도침(陶枕: 그릇을 받쳐 굽는 요도구(窯道具))이 다량 발견되기도 하였다.
2호가마는 아궁이·소성실·굴뚝으로 연결되는 구조가 잘 남아 있었는데, 총 길이 25m, 소성실 내벽의 너비 1.4m, 바닥 경사도 20°의 기울기를 갖고 있었으며, 1호가마에 비하여 규모가 훨씬 크다.
이 가마는 기반(基盤)을 이루는 풍화된 마사토와 점토가 혼합된 생토층(生土層)을 깎아 반지하 아래에 바닥을 조성하고 벽과 천장을 둥글게 올려 궁륭형(穹隆形)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즉, 가마의 구조는 반지하에 설치한 一자형의 통형가마[筒形窯] 형태를 하고 있다.
이 가마는 가마벽을 조성할 때 바로 옆에서 파낸 생토를 이용하였으며, 흙을 파낸 자리를 폐기물 파편으로 메워 평탄하게 만들고 가파른 측면 출입공간에 돌계단을 배치하여 활용했다는 점에서 지형지물을 효율적으로 사용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특히 이 가마의 천장 퇴적에서 발견된 15차 이상의 보수 흔적과 가마 주변의 두꺼운 폐기물층은 이 가마가 오랫동안 운영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들 가마에서 발견된 유물은 주로 간략한 초화문(草花文)이 상감된 대접과 접시를 비롯한 생활용기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크게 두 개의 층위(層位)를 이루는 퇴적층의 아래에서는 고려 말기의 전통이 강한 상감청자들이 많이 출토되었으며, 위층에서는 ‘內(내)·資(자)·執(집)·用(용)’과 같은 명문(銘文)이 씌어 있는 인화분청사기(印花粉靑沙器)가 함께 출토되었다.
이 명문들은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쓰던 각종 음식과 내연(內宴)·직조(織造) 등의 일을 관장하던 내자시(內資寺)를 가리키는 것으로, 어느 때인가 내자시에 도자기를 공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다수의 유물들이 대량 생산체제 속에서 포개구이로 제작된 것과는 달리, 인화분청사기는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청납품용으로 제작된 것이 확실하다.
유물의 양식적인 발달과정으로 볼 때 이 가마는 15세기 초반에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선 혹은 면상감기법에서 인화상감기법으로 넘어가는 분청사기의 과도적인 모습과 관요(官窯) 설치 이전 단계인 조선시대 초기 지방 가마들의 운영상태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