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95년 해강도자미술관(海剛陶磁美術館)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고려 전기에 청자를 생산했던 청자가마 2기와 고려 후기의 기와가마 1기가 발견된 가마터이다.
청자 1호가마는 총길이 약 17.5m, 가마 내벽의 폭 1.2m, 바닥[窯床] 경사도 22∼25˚가량의 규모를 갖고 있다.가마 아궁이의 평면은 불길을 골고루 분산시키기 위하여 하트형(심장 모양)을 하고 있으며, 굴뚝 부분은 여러 장의 판석(板石)을 가로막아 조성하였다.
소성실(燒成室)이 불완전하지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시대의 온전한 가마구조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청자 2호가마는 조사여건상 아궁이와 소성실의 하단을 제외한 채 소성실 일부와 굴뚝 부분만 조사하였는데, 드러난 가마의 길이는 12.8m, 내벽 폭 120cm, 바닥의 경사는 15˚가량으로 굴뚝 부분에는 개축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들 두 청자가마는 주변의 지표면을 인위적으로 파내어 소성실이 지상에 노출된 것처럼 바닥을 다진 다음 가마를 축조한 완전한 지상식(地上式)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아궁이에서 굴뚝부에 이르기까지 '一'자형을 이루는 통형가마[筒形窯]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들 두 청자가마 사이에 위치한 기와가마는 총 길이가 16.2m, 내벽 폭은 넓은 곳이 약 2.3m, 좁은 곳이 약 1m의 유선형(流線形)으로 규모가 비교적 큰 편이다. 약 20˚의 급경사를 이루는 가마바닥은 마사토층을 깎아 조성한 지하에 터널식으로 되어 있으며, 아궁이 입구와 굴뚝 부분만을 지상에 노출시켜 축조하였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청자는 가는 모래가 약간 섞인 거친 태토(胎土)에 녹색의 반투명 유약을 바른 대접·접시·완(碗)·잔·매병(梅甁)·반구병(盤口甁)·항아리·뚜껑 등과 같은 생활용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기와가마에서 발견된 기와들은 모래가 섞인 점토를 빚어구운 반경질(半硬質)의 유물이 중심을 이루는데 마름모꼴 문양이나 퇴화된 어골문(魚骨文)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청자를 제작한 방법은 물레를 이용한 것이 기본을 이루고, 여기에 앵무새·국화·연꽃·모란·당초(唐草)와 같은 소재를 오목새김과 돋을새김 또는 압출돋을새김[押出陽刻]과 같은 기법으로 표현하였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뇌문(雷文 : 번개무늬)을 흑상감(黑象嵌)한 파편이 발견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청자를 구웠던 방법은 가마 내부에 포개구이를 한 것이 가장 많으며, 그릇의 내외면에는 서로 들러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굽에 모래와 내화토(耐火土)를 혼합한 번조받침을 3∼4 군데에 받쳤다.
수습된 청자파편들은 고려청자의 주요 생산지로 알려진 전라남도 강진의 청자가마터에서 생산된 왕실용 청자와는 달리 고려 전기 지방청자의 한 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전 인근의 보문산성지(寶文山城址)나 고려고분에서도 동일계통의 청자편이 발견되고 있어, 이곳에서 생산된 청자는 대전일대의 호족층이나 관청·사찰 등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