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의 총길이 약 26m, 내벽 너비 약 1.4m. 1997년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97년해강도자미술관(海剛陶磁美術館)에서 실시한 발굴조사에 의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경에 운영된 백자가마 1기와 온돌 등 부속 작업시설 3개소가 확인되었다. 바닥의 경사도 약 20°안팎의 규모를 가진 반지하식 오름가마로서, 아궁이·소성실(燒成室)·굴뚝의 전체 구조가 거의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특히 소성실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2개씩의 커다란 불창[火窓] 기둥이 있어 전체가 5개의 방으로 구분되며, 각 방의 우측 벽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1개씩의 출입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소성실이 몇 개의 방으로 구분된 가마구조는 17세기 이후 조선과 일본의 자기가마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계단식 칸가마의 구조에 선행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가마는 가마의 바닥면이 아직 완전한 계단식이 아닌, 이른바 경사계단식(傾斜階段式)이며, 각 방의 구분도 완전한 벽이 아닌 기둥으로 되어 있어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로 이어지면서 발전해온 통형가마[筒形窯]의 구조를 계승하고 있다. 따라서 정생동가마는 통형가마에서 계단식의 칸가마로 발전해 가는 단계의 중간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마구조 발달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가마터에서는 대부분 문양이 없는 회청색의 백자파편이 출토되었으며, 백자와 함께 요업 당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분청사기철화초문대반(粉靑沙器鐵畫草文大盤)·옹기항아리·질그릇단지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백자는 정선된 회색 태토(胎土)로 빚은 다음 옅은 청백색을 띠는 투명 유약을 거칠게 발랐는데, 초벌구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번에 유약까지 씌워 고온으로 굽는 번조(燔造)방법을 택하였다.
또한 굽바닥에는 굵은 모래를 발라 여러 개의 그릇을 포개서 구웠는데, 이렇게 포개굽는 것은 자기의 생산효율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정생동가마를 비롯한 지방가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요지의 주변에 흩어져 있는 백자파편은 대접·접시·종자(鍾子 : 종지)와 같은 식기류가 가장 많으며, 이 밖에도 약간의 항아리·병·뚜껑·제기 등과, 十자 모양의 철화문(鐵畫文)이 그려진 철화문접시편 몇 점이 발견되었다.
이 요지 출토의 백자는 양식적으로 16세기 말부터 나타나는 조선전기 도자양식의 쇠퇴형식을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일부 그릇의 형태나 모래받침법 등에서는 17세기부터 등장하는 조선 중기 도자양식이 보이기도 하여 조선 전기와 중기의 양식이 혼재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와 같이 정생동백자가마터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백자의 양식은 가마의 형식과 함께 우리 나라 도자사(陶磁史)에서는 물론,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일본에 전파된 자기 제작기술의 전파과정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