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3월 1일 충청북도 청주시 남문로 2가에서 창간된 이 지방 최초의 신문이다. 사장 겸 발행인은 김원근(金元根), 부사장 겸 편집인은 김동환(金東煥), 편집국장은 홍승구(洪承耉)이었다. 처음에는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발행되다가, 1952년 10월 2일부터 타블로이드배판으로 확장하였다.
사시(社是)를 ‘민족의 발전, 민주언론의 창달, 지방문화의 향상, 시시비비’에 두고, 민족진영의 대변지임을 자처하여 좌익계열의 선동과 파괴활동을 타도하는 데 앞장섰다. 서울발신 기사와 외신을 1면에 싣고 2면에는 청주지방 소식과 계몽기사를 실었는데, 특히 ‘운동경기란’을 두어 충청북도 내의 체육행사를 자세히 보도하였다.
5호까지 내고 주식회사로 발족하기 위한 공장 이전과 제반준비관계로 휴간했다가, 1946년 5월 28일 다시 속간하였다. 1948년 2월에는 이도영(李道榮)이 적극 투자를 하여 재정난에서 조금씩 탈피하게 되었다.
1949년 1월 당시 충청북도지사였던 윤하영(尹河英)의 공금유용과 독직사건(瀆職事件)을 폭로, 보도했는데, 이것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마(魔)의 복마전사건(伏魔殿事件)’이었다.
6·25전쟁 때에는 장기간의 휴간에 들어갔으나 한때 피난판(避難版) 1만여 부를 발행, 충청북도 피난민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1952년 5월 29일 ‘김성수(金性洙) 부통령 사표제출’을 ‘이대통령 사표제출’로 오보함으로써 통신부장을 비롯, 여러 직원들이 고초를 겪었으며, 1953년 5월 20일에는 ‘대통령(大統領)’을 ‘견통령(犬統領)’으로 오식, 보도함으로써 편집국장을 비롯하여 편집국 간부진들이 구속되었다.
또한, 1953년 11월 28일 ‘한·일(韓日)’을 ‘일·한’으로 잘못 표기함으로써, 군정법령 제88호에 따라 폐간되었다. 4개월 뒤 『충북신보(忠北新報)』로 개제되어 재건되었다가 『충청일보(忠淸日報)』로 개편되었다. →충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