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요론』은 손진태의 『 국사대요(國史大要)』에 나타난 신민족주의 역사관에 영향을 받아 저술되었는데, 자서(自序)가 1949년 12월에 작성되고 1950년 4월에 금룡도서주식회사에서 출간된 것으로 보아, 1949년 말1950년 초에 집필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인영(李仁榮, 1911?, 1950년 납북)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연희대학교 교수를 겸직하고 있었다.
제1장 민족과 환경에서 “국사는 우리 민족이 대한 반도와 만주에 걸쳐서 과거 수천 년 동안 생활하여 온 기록이다.”라고 정의하여, 우리 역사의 공간 범위를 만주까지 포괄해 보았다. 이는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집필되었으나 6 · 25 전쟁 이후 간행된 『한국만주관계사의 연구』(1954)의 역사지리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또한 “씨족, 부족, 민족의 발전 과정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시간적 지속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계인류사회의 공통된 현상이다.”라고 하며, 제2장 이하에서 원시 씨족사회(신석기시대)-부족국가-민족의 통일(7세기 신라의 삼국통일)을 단계적으로 서술하였다. 부족국가 다음에 귀족국가 단계를 따로 설정하지 않은 것은 손진태와 다른 점이다.
이 책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의해 비로소 우리 민족이 하나의 민족으로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시각이 있다. 그리고 '후세의 사가(史家)가 발해를 우리나라의 북조(北朝)라고 하지만 그 지배계급이 고구려 사람이었고 그 구성원 대부분이 말갈족이었다는 내용 등'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신라의 민족 통일 이후 주위 여러 민족과 투쟁하며 민족문화 건설에 힘써 왔는데,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완전한 민족문화를 가진 한 민족으로서 오늘날과 같은 하나의 국토, 언어, 문화, 민족정신을 갖게 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 책의 결장인 제25장 국사와 세계사에서는 손진태의 왕조 중심 시대 구분을 비판하면서, 신라의 민족 통일 이전을 ‘민족의 태동기’, 민족 통일부터 세종대왕 시기까지를 ‘민족의 성장기’, 세종대왕 이후 갑오경장 직전까지를 ‘민족의 침체기’, 갑오경장 이후를 ‘민족의 각성기’로 구분하였다. 신라의 민족 통일 이후 중요한 획기로 세종대왕 시기를 주목해 본 것이다.
제25장 국사와 세계사는 이 책이 출간되기 직전 『 학풍(學風)』 11호(1950. 3)에 실었던 글을 다시 수록한 것으로, 여기서 손진태의 신민족주의 역사관을 소개하면서 높이 평가하였다. 이인영은 손진태의 신민족주의 역사관을 수용하면서도 “민족적 세계관, 세계사적 국사관”으로 바꾸어 표현하였다.
부록 「우리 민족사의 성격」은 원래 『학풍』 1호(1948. 10)에 발표했던 것으로, ‘국사와 세계사’와 함께 이 책의 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 민족사회의 내적 요소로서 소규모 농업사회적 성격을 들 수 있으며 외적 요소로서 국제상 중간 존재적 성격을 지적할 수 있다.”라고 한 부분은 식민주의 역사관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하지 못한 한계로 비판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