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중(敬仲). 권영(權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권박(權博)이고, 아버지는 종묘서령(宗廟署令) 권덕유(權德裕)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우찬성 조계상(曺繼商)의 딸이다. 동생이 예조판서 권극지(權克智)이다.
1558년(명종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등제, 승문원과 예문관의 벼슬을 거쳐 전적(典籍)을 지내고 정언(正言)에 올라 당시의 권신들을 탄핵하여 직언(直言)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1566년 병조좌랑이 되고 이후 사헌부지평·사간원헌납·병조정랑을 역임하고,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으로 『명종실록』의 편수에 참여하였다. 1570년(선조 3) 부수찬이 되고 1572년 원주목사가 된 뒤 길주목사로 임명되었다가 의주에 기근이 들자 다시 의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충청감사를 지내고 판결사·우부승지를 지냈으며 1581년 호조참판에 재직시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3년 함경감사에 제수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가, 8월에 다시 직첩을 환급받고 경상감사에 임명되었으며 곧 대사성과 대사헌을 지냈다.
1588년 조헌(趙憲)의 상소에서 노수신(盧守愼)·정유길(鄭維吉)·유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붕당을 이루고 있다고 탄핵받았다. 1589년 박충간(朴忠侃) 등과 함께 정여립(鄭汝立)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였고, 그해 겨울 행해진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예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이조판서에 오른 뒤 죽었다. 성격은 과묵하고 사람을 온화하게 대하였으며, 정치에 있어서는 대체(大體)를 지키고자 할 뿐 별다른 창의성은 보이지 않았다는 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