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상주판관으로 상주 북천전투에서 순절한 문신.
이칭
응선(應善)
봉호
영풍군(永豊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0년
사망 연도
1592년
본관
안동(安東)
출생지
한성(漢城)
주요 관직
상주판관(商州判官)
내용 요약

권길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상주판관(商州判官)으로 상주전투에서 싸우다 순절한 문신이다.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음보(蔭輔)로 기용되어 상주판관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군사와 합세하여 상주 북천(北川)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군과 싸웠는데, 호장(戶長) 박걸(朴傑)을 비롯하여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호응하였다. 최선을 다했지만, 무기와 군사수의 열세로 패하여 순절하였다. 뒤에 상주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상주판관으로 상주 북천전투에서 순절한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응선(應善)이다.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의 6세손이다.

주요 활동

음보(蔭補)주1로 기용되어 관직이 상주판관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조정으로부터 중로(中路, 혹은 2로)에서 일본군을 막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주2 이일(李鎰)이 4월 23일 상주에 도착하였다. 4월 18일 일본군이 고령(高靈)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주목사(尙州牧使) 김해(金澥)는 군관(軍官)들을 데리고 순변사의 행차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도망해 버리고, 판관 권길만이 상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때 도착한 순변사 이일은 권길에게 군사가 없음을 꾸짖고 군사를 모으게 하였는데, 그는 상주 인근을 수색하여 700여 명의 군사를 모집하였다.

4월 24일 일본군이 상주에서 20리 떨어진 장천(長川)에 주둔하였으나, 이일의 군대는 척후병(斥候兵)이 없어서 이를 알지 못하였다. 25일 상주의 북천에서 모집된 농민 중심의 군사를 모아서 군사 훈련을 하고 있는데, 일본군 1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가 급습하였다. 적이 사방을 에워싸고서 조총(鳥銃)으로 공격하자, 주3에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하였다.

이에 앞서 이일이 상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 때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킬 것을 맹세하자, 호장(戶長) 박걸(朴傑)을 비롯하여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호응하였다. 그러나 무기와 군사수의 열세로 패색이 짙어지자, 이일은 탈출하여 충주로 도주하였다. 이때 상주판관 권길, 호장(戶長) 박걸(朴傑), 종사관(從事官) 이경류(李慶流) 등은 함께 싸우다가 모두 순절하였다. 권길이 의관(衣冠)을 바로 하고 죽자, 박걸도 우리 제후(諸侯)가 나라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내가 제후를 버릴 수 있겠는가 하고 따라 죽었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뒤에 좌승지(左承旨)에 주4되었다. 1602년(선조 35) 충청북도 음성군에 충신문(忠臣門)으로 주5 받았다. 1675년(숙종 1) 상주 북천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으며,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에 모셔졌다.

참고문헌

원전

『검간선생문집(黔澗先生文集)』
『계당선생문집(溪堂先生文集)』
『국조보감(國朝寶鑑)』
『난중잡록(亂中雜錄)』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서원등록(書院謄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창석선생문집(蒼石先生文集)』

단행본

이형석, 『임진전란사』 상(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1974)

논문

우인수, 「임란시 상주 북천전투의 실상과 현창사업」(『역사교육논집』 62, 역사교육학회, 2017)
김강식, 「임진왜란과 상주 의병」(『상주문화연구』 22, 상주문화연구소, 2012)
주석
주1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 또는 그 벼슬.    우리말샘

주2

조선 시대에, 왕명으로 군무(軍務)를 띠고 변경을 순찰하던 특사.    우리말샘

주3

강가나 바닷가에 있는 넓고 큰 모래벌판.    우리말샘

주4

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 종이품 벼슬아치의 부친, 조부, 증조부나 충신, 효자 및 학행(學行)이 높은 사람에게 내려 주었다.    우리말샘

주5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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