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생은 조선 전기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의 의병장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판관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義)를 부르짖고, 의병을 모집하였고, 개인 재산을 털어 군량미를 확보하였다. 휘하 의병을 이끌고 전라도에서 일본군과 싸워 전공을 세웠다.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에 오르고, 뒷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본관은 경주(慶州). 계림군(鷄林君) 김혼(金琿)의 후손이다. 아들이 의병 활동을 함께한 김응춘(金應春)이다.
주요 활동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義)를 부르짖고 일어나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개인 재산을 내어 군량미를 확보하였다. 휘하 의병을 이끌고 전라도 곳곳에서 일본군과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임금이 북으로 피란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김응춘(金應春)과 함께 왕의 주1에 나아갔으나, 오래도록 노지에서 고생하다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