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엄 (+)

권엄 초상
권엄 초상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병조판서 · 지중추부사 ·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공저(公著)
섭서(葉西)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29년(영조 5)
사망 연도
1801년(순조 1)
본관
안동(安東)
주요 관직
병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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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병조판서 · 지중추부사 ·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저(公著), 호는 섭서(葉西). 권옹(權顒)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권엄(權弇)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권밀(權謐)이며, 어머니는 유춘영(柳春榮)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65년(영조 4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773년 지평으로 있으면서 과거를 빈번히 실시하지 말 것을 상소하였다가 추자도(楸子島)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781년(정조 5)에 헌납(獻納)이 되고 1790년 충청도관찰사 · 대사간 · 공조판서 · 형조판서를 두루 지냈다.

한때, 강계부사 · 전라도관찰사, 1795년 강화부유수 등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병조판서로 기용되었다. 1801년(순조 1)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있을 때 이가환(李家煥) · 이승훈(李承薰) · 정약용(丁若鏞) 등 천주교신자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였다.

한성판윤으로 있을 때 왕의 총애를 받던 태의(太醫) 강명길(康命吉)이 민가 수십호를 옮기는 문제로 몇 차례에 걸쳐 송사(訟事)를 일으켰으나 끝내 가난한 백성들을 옮기게 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려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목민심서(牧民心書)』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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