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적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동지의금부사, 예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사순(士順)
인물/전통 인물
  • 본관강릉(江陵)
  • 사망 연도1750년(영조 26)
  • 성별남성
  • 주요 관직형조참판
  • 출생 연도1708년(숙종 34)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오성 (세종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6년 01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동지의금부사, 예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사순(士順). 김득원(金得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홍주(金弘柱)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김시형(金始炯)이며, 어머니는 이광조(李光肇)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33년(영조 9)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교리(校理)가 되었다.

1735년 사관(史官)이 되어 사초(史草: 時政을 기록한 初稿)의 작성에 종사하였으며, 1741년 홍상한(洪象漢)을 대신하여 관동어사로 파견되었다. 곧 지평(持平) · 장령(掌令)을 거쳐, 1743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응교(應敎)로서 궁중에서 사용할 가인례(家人禮)에 대해 진술하였다.

1746년 경상도심리사(慶尙道審理使)를 역임하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1748년 형조참의로 있으면서 참핵사(參覈使)로 봉황성(鳳凰城)에 가서 압수한 것을 영수하는 것과 잃어버린 은(銀)에 대한 두 안건을 추고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와 예조참판이 되었다.

1750년에 형조참판을 지냈다. 그 해에 어염세를 균등히 하기 위하여 6도에 삼사(三使)를 파견할 때 경기 · 황해 두 도의 균세사(均稅使)로 나가 민정을 살폈다. 풍모와 지기가 뛰어났고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참고문헌

  • - 『영조실록(英祖實錄)』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이계집(耳溪集)』

주석

  • 주1

    :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十五(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 주2

    : 참핵사 활동 : 『영조실록』 68권, 1748년(영조 24) 11월 14일. "참핵사 김상적이 이윤방의 잃어버린 은자에 대해 단지 사리로서 깨우칠 것을 아뢰다"

  • 주3

    : 균세사 활동 : 『영조실록』 72권, 1750년(영조 26) 10월 8일. "비변사가 갑자기 죽은 균세사 김상적의 일에 대해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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