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익보(翼甫), 호는 긍파재(肯播齋). 아버지는 권득추(權得錘)이며, 어머니는 풍산유씨(豐山柳氏)로 유약춘(柳若春)의 딸이다. 김홍규(金弘奎)·이중원(李重遠)의 문인이다.
1837년 사마시에 합격, 1850년(철종 1)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봉상시직장·성균관전적·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804년(고종 1) 이조정랑에 제수되고, 1866년 안주(安州) 대동찰방에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요로에 있던 김병기(金炳冀)가 만일 고집을 꺾는다면 전로(前路)를 끌어주겠다고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당시 친분이 있던 박규수(朴珪壽)가 관찰사로 재임 중이었는데, 그에게 김병기의 말을 상기시키면서 고집을 꺾을 것을 종용했으나, 그는 도잠(陶潛)의 「귀거래사」를 모방하여 사(辭)를 지어 뜻을 보이고 향리로 돌아갔다.
1872년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자, 선비의 사기가 모두 꺾이겠다고 탄식하고, 이후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저서로 『긍파재문집(肯播齋文集)』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