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器臺)·감대(坩臺)라고도 불리며, 특히 경상도지방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였다. 평양도제리(道濟里) 50호분에서 출토된 낙랑시대의 기대로 보아 중국에서는 이미 한나라 때에 기대의 기형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고, 일본에는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중기 이후에 유행하기 시작하여 고분시대(古墳時代)의 스에키(須惠器)·하지키(土師器)에 크게 융성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가야·신라지역의 전 지역에 걸쳐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으나 백제지역에서는 공주·부여지방에 한정되어 소수의 기대가 발견되었으며, 고구려지역에서는 아직 발견된 예가 없는 것으로 보아 낙동강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토기였음을 알 수 있다.
경상도지방의 기대 형태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아래위가 밖으로 벌어진 원통형으로 맞뚫린 것이고, 다른 한 형식은 나팔처럼 높은 다리에 주발을 붙인 듯한 대형 무개고배(無蓋高杯)와 같은 형태이다.
전자는 평양 도제리의 출토품인 점으로 보아 중국 한나라에 기원을 두고 있는 듯하며, 원래부터 그릇받침의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후자는 맞뚫린 것도 있으나 무개고배처럼 막혀 있는 것이 많고 또 받침 부분이 깊숙한 주발 형태도 있어 그릇을 받치는 용도 외에 무엇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많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두 그릇이 올려져 있는 상태로 고분에서 발견되는 예가 있으므로 그릇받침으로 사용된 것은 틀림없으며, 다만 기형의 성격으로 보아 일상용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제의적(祭儀的) 성격을 띤 공헌용(供獻用)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위가 맞뚫린 고식(古式) 기대는 고령·함안 등 가야지방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후기양식은 가야·신라지역에서 모두 발견되고 있다.
형태는 그릇을 받는 부분[口部], 그 아래에 붙어 점차 넓어지는 통모양의 몸체, 그리고 그 아래에 급히 밖으로 확장되면서 내려가는 기부(基部)로 나누어지는데, 몸체와 기부에 삼각형·원형·장방형 등 여러 가지 형태의 투공(透孔)이 있거나 돌대(突帶)가 돌아가기도 하며 장식띠를 붙이기도 한다.
초기의 기대는 기형이 예리한 것이 특색인데, 특히 가야기대는 몸체나 기부에 날카로운 돌대가 보인다. 성주2호분·함안 34호분 출토품은 통형(筒形)을 여러 개 쌓은 형태이거나 점토띠로 연결하여 못자국을 나타냈는데, 이런 요소들은 토제기대의 조형(祖型)이 목제품에서 유래한 것임을 말해 준다.
신라에서는 중기에 이르면 기부의 곡선이 직선화되고 기형이 정형화되면서 깊은 V자형 구부에 몸체가 생략되고 기부가 붙은 양식이 널리 유행하게 된다.
백제지역에서는 신라·가야보다 시작이 늦어 5세기 말이 되어서야 공주지방에서 나타나는 듯하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기대는 파편을 포함하여 40여 개체분이 되는데 공주·부여지방에 밀집분포하고 있으며, 논산의 연산지방에서 출토된 1점 외에는 모두 백제 특유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백제기대는 크게 공주 송산리(지금의 금성동)에서 출토된 장고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형태와 통형의 기대로 나눌 수 있다. 송산리출토품은 접시 같은 낮고 작은 구부에 보주형(寶珠形)으로 아래로 퍼지는 통형의 몸체, 그리고 갑자기 아래로 넓게 퍼지는 기부로 이루어져 전체 모양은 장고의 2분의 1에 해당한다.
몸통부에서 기부 윗부분에까지 돌대로 3단을 구분하여 그 사이에 고사리문을 세로로 배치하였고 기부에는 둥근 투공을 뚫었다.
이런 형태의 기대 가운데에는 연질에 유약(釉藥)을 씌운 것도 나타나는데, 백제 특유의 기형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며, 시대폭도 길고 분포지역도 넓어 공주지방을 중심으로 부여에서도 발견된다.
통형기대는 가야·신라지역의 것과 형태가 비슷하나 장식문양에서는 차이가 난다. 가로로 돌대를 몇 가닥 돌리고 돌대 위에 방울장식을 붙이거나 나선장식띠를 세로로 붙여 돌출시키는 것은 백제양식으로 볼 수 있다.
가야·신라지역의 기대가 분묘의 부장품으로 사용된 데 비하여 백제지역에서는 연산지방 출토의 신라식 기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폐사지(廢寺址)에서 발견되거나 호관묘(壺棺墓)로 전용(轉用)된 것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