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금원(錦園). 강원도 원주(原州) 출신.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의 동인이다.
어려서부터 병을 잘 앓아 몸이 허약하므로 그의 부모가 글을 배우도록 했는데, 글을 뛰어나게 잘해서 경사(經史)에 능통했고 고금의 문장을 섭렵하여 시문에 능했다. 평생 남자로 태어나지 못하였음을 한하면서 1830년(순조 30) 3월 14세 때 남자로 변장하고 단신 금강산을 유람하여 견문을 넓혀 시문을 짓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돌아와서 시랑이며 규당(奎堂)학사인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다. 1843년(헌종 9)에는 27세의 나이로 문명을 떨쳐, 세상에서 ‘규수 사마자장(司馬子長)’이라고 칭호하였다.
1845년(헌종 11)에는 김덕희와 함께 서도와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1847년(헌종 13)에 돌아와 서울 용산에 있는 김덕희의 별장인 삼호정에 살면서 같은 처지의 벗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규합하여 시문을 지으면서 시단을 형성하였다. 이때의 동인들이 김운초(金雲楚) · 경산(瓊山) · 박죽서(朴竹西) · 경춘(瓊春) 등이었다.
1850년(철종 1)에는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를 탈고하고 1851년(철종 2)에 『죽서시집』 발문을 썼다. 일찍부터 충청도 · 강원도 · 황해도 · 평안도 일대, 즉 호동서락(湖東西洛) 등의 명승지를 주유 관람하고, 또 내 · 외금강산과 단양일대를 두루 편력하면서 시문을 써서 시 「호락홍조(湖洛鴻爪)」 등이 수록된 시집 『호동서락기』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