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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 자동차 · 비행기 · 배 등이 왕래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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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사람 · 자동차 · 비행기 · 배 등이 왕래하는 공간.
내용

길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 뜻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교통 수단으로서의 길, 둘째는 방도를 나타내는 길, 셋째는 행위의 규범으로서의 길이다.

교통 수단으로서의 길은 구상적 실체로서 본래는 단순히 보행을 위한 육상교통의 수단으로서의 길만을 가리켰다. 이런 뜻에서 길을 정의한다면, 사람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오갈 수 있게 된, 거의 일정한 너비로 땅 위에 뻗은 공간적 선형(線形)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그 길의 양태나 규모에 따라서 ‘길’ 앞에 어떤 관형어를 붙여 오솔길·고샅길·산길·들길·자갈길·진창길·소로길·한길·지름길 따위와 같이 의미를 구체화하여 사용한다. 이와 같은 보행을 위한 육상 통로는 교통기관이 발달함에 따라 개념이 확대되고 다양화되어 실체가 없는 관념적 통로까지를 일컫게 되었다.

그리하여 물위를 다니는 배의 통로는 뱃길, 철제의 궤조(軌條: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나 전철의 통로는 철길, 항공기가 다니는 공중의 통로는 이를테면 하늘길이 될 것이다.

이러한 교통 수단으로서의 길에서 뜻이 분화되어 어떤 일에 취해야 할 수단이나 방법을 뜻하는 방도(方途)라는 개념이 파생되었다. ‘무슨 길이 없을까?’, ‘손쓸 길이 없다.’라고 할 때의 길은 교통 수단의 길이 교통 이외의 수단으로까지 확대된 개념이다.

또 교통 수단으로서의 길은 정신 문화가 깨쳐지면서, 특히 동양 사람들에 의해서 철학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서양에서는 흔히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고 세상은 무대로, 사람은 배우로 관념하는 데 대해서, 동양에서는 인생이 곧잘 여행에 비유된다. 이때 세상은 여관으로, 사람은 나그네로, 인생살이는 길 가는 것으로 관념하는 일이 많다.

이백(李白)이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은 백대의 과객이라.”고 한 생각도 여기서 나온 것이요, 요즘 우리 가요에 “인생은 나그네길……” 하는 노래가 불리고 있는 것도 같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유교나 불교·도교 할 것 없이 동양 사상에서는 그 이념을 길[道]이라 하고,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심성이나 행위를 도의니 도덕이니 하여 길로써 표현한다.

왕도정치(王道政治)니 공맹지도(孔孟之道)니 하는 말이나, ‘군자 대로행’이니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를 말라. ’는 우리 속담의 길도 모두 도의(道義)의 상징으로 쓰인 것들이다.

이때의 길은 최초의 개념인 교통 수단과는 동떨어진 것이지만, 사람들이 추상적인 ‘도’를 숭상한 데서 다시 실체로서의 길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왕도(王道)는 곧 치도(治道)’라 한 『예기』의 표현이나 하천에 다리 놓는 일을 인생 제도(濟度)의 실천적 행위로 해석하는 불가의 사고에서 그 구체적 사례를 엿볼 수 있다.

사실 통로라는 개념 속에는 교량이나 나제통문(羅濟通門) 같은 터널까지 포함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또 길은 구조상으로 갓길[路肩]와 측구(側溝: 물이 잘 빠지도록 차도와 인도의 경계를 만든 얕은 도랑)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대전회통』 교로조(橋路條)에는 측구의 구격까지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말로 ‘길’이라고 읽을 수 있는 단어가 문헌상 처음 보이는 것은 신라의 향가에서일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우리말을 적을 국자(國字)가 없었으므로 한자를 빌려서 그 음 또는 새김으로 우리말을 적는 향찰(鄕札) 표기였다.

먼저 진평왕대에 융천사(融天師)가 지은 「혜성가(彗星歌)」와 효소왕대에 득오(得烏)가 지은 「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에 각각 ‘道尸’라는 단어가 똑같이 나오는데 향가 연구가들은 예외 없이 이것을 ‘길’이라 해독하고 있다.

향가에는 이 밖에도 길을 뜻하는 말로 ‘노(路)’ 또는 ‘도(道)’도 보이고 있어 그것들은 ‘길’로, 또는 한자음 그대로 읽을 양면의 해독이 가능하겠다.

그러나 ‘道尸’의 경우는 ㄹ받침으로 관용된 ‘尸’를 첨기함으로써 ‘道尸’의 ‘道’가 ‘도’라 읽지 않고 ‘길’이라 읽는다는 것을 밝히고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길’이라는 말은 한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순수한 우리말로 써내려 왔을 것으로 추측해도 좋을 것이다.

고려 시대에 내려와서도 그런 흔적이 발견된다. 1100년 무렵의 고려어를 한자로 적어 전하는 송나라 손목(孫穆)의 『계림유사(鷄林類事)』 고려 방언조의 ‘행왈기림(行曰欺臨)’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간다는 말을 고려사람들은 ‘기림’이라 하더라는 것이다. ‘欺臨’은 글자대로 읽으면 ‘기림(ki-lim,ki-rim)’이겠으나 아마도 ‘길님(kil-nim)’의 연철(連綴) 표기일 것이다.

‘길’은 물론 ‘道’요, ‘님’은 ‘가다(行)’의 옛말인 ‘니다’의 명사형이 분명하다. 이로 미루어볼 때 신라어 ‘길’은 고려에서도 그대로 쓰이다가 조선 시대를 거쳐 자연스럽게 오늘날까지 일관하여서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길’이 한글로 명백히 표기되어 『훈민정음』과 같은 시대에 지어진 『용비어천가』에도 용례가 나오고 있다.

그러면 과연 ‘길’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쓰였으며 그 어원은 무엇일까? 본디 길은 인류의 생존사와 함께 생성, 발전한 것이므로 ‘길’이라는 말도 우리 민족사와 함께 발생한 원초적 어휘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한다. ‘길’이란 인간의 의식(衣食)과 주거(住居) 사이를 연결하는 공간적 선형이라 할 수 있다.

원시인들이 의식의 재료인 조수(鳥獸)·과실·어패(魚貝) 따위를 주거인 굴혈로 운반하기 위해 반복 통행하면서 생긴 발자취가 곧 길의 원초적 형태였다면, 그들의 생활에서 가장 많이 반복 통행한 곳은 식수원(食水源)과의 통로였을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주거와 일정한 식수원인 골짜기와의 연결선에서 길의 첫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요, 동시에 길의 어원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옛 기록들에 나타난 것을 보면 우리 선민들은 산골짜기에서 굴을 파고 산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골(ko:l)’에서 ‘굴(ku:l)’을 파고 살면서 ‘길(kil)’을 따라 물을 먹으러 다녔다고 상상할 때 어떤 어원적 암시를 얻어낼 수 있다.

여기서 모음의 차이가 나타나지만 분화 전의 원형 모음을 ‘·(아래아)’라 한다면 ‘골(谷, 洞)’과 ‘굴(穴居)’과 ‘길(徑·路)’은 모두 동일한 ‘ᄀᆞᆯ’을 어원으로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 즉 주거처인 ‘골’에 있는 ‘굴’에서 식수원인 ‘ᄀᆡ올’과의 사이를 잇는 통로가 곧 ‘길’인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분화되기 전의 공통 어원은 모두 ‘ᄀᆞᆯ’이었으니, 따라서 길의 어원도 ‘ᄀᆞᆯ’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길’이라는 말은 선사 이전부터 있어온 말이 아닐까 한다.

앞에서 길은 인류사와 함께 생성, 발달해왔다 하였으나, 그것이 사료로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아프리카 알제리 영내의 사하라 사막에서 발견된 타시리 나젤 암벽화 중 ‘소의 시대’라고 분류된 서기전 45∼15세기기(期)에 소를 타고 여행하는 그림과 배의 그림이라 하니 길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있어 왔는가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우리 나라에서의 길의 역사는 민족의 이동과 정착 과정에서부터 더듬어야 할 것이나 이 방면의 연구가 아직 미진한 상태이므로 섣불리 언급할 수 없고, 삼국의 성립에서부터 사료 중심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의 역사적 문헌에서의 길은 ‘도로(道路)’ 또는 ‘도(道)’나 ‘노(路)’ 등 한자어로 표현되어 있다. 물론 우리말의 길이 도로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관념상으로는 이미지가 다소 다르다.

우리말의 길이라 하면 좀더 자연스런 통로를 연상하는 데 비해 도로라 하면 이른바 신작로 이후의 인공으로 정비된 고규격의 길을 연상한다. 우리 국어 사전에도 도로는 “사람이나 차들이 편히 다닐 수 있도록 만든 비교적 큰 길” 따위로 주석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한자에는 길을 뜻하는 글자가 10여 자가 있어 각기 조금씩 다르게 해석되지만, 길의 규모에 따라 많이 쓰이는 글자는 경(徑)·도(道)·노(路)의 셋이다.

『주례(周禮)』의 주석에 따르면 “경은 우마를 수용하고, 진(軫)은 대거(大車)를 수용하고, 도는 승거(乘車) 한 대를 수용하고, 도는 두 대를 수용하고, 노는 세 대를 수용한다.”고 하였다. 짐작컨대 경은 우리의 오솔길이나 소로길에, 도는 그보다 좀 나은 길에, 노는 가장 큰 길에 해당할 것 같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의 역로 이름을 ‘운중도(雲中道)’ 따위와 같이 모두 ‘도’로 썼는가 하면 조선 시대의 법전에는 ‘도성내 도로’와 같이 ‘도로’라 하다가 ‘대로·중로·소로’와 같이 ‘노’를 쓰기도 하여 일정한 기준이 없었다.

삼국사에서 도로와 관련된 자료가 비교적 많은 나라는 신라이다. 신라는 서기전 37년경 이미 경주를 중심으로 6촌이 흩어져 있었는데, 이들로부터 추대된 혁거세왕은 6촌을 순회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농잠을 장려하였으며,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하였다는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거서간 17년조 및 21년조의 기록으로 미루어 경주와 6촌 사이에 육로가 열려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세기 중엽에는 영로(嶺路)가 개척되어 156년(아달라왕 3)에는 계립영로(鷄立嶺路)를 개척하였고, 이듬해에는 왕이 장령진(長嶺鎭)을 순행하였으며, 158년에는 죽령(竹嶺)을 개척하였다고 했으니 국내 전역에 걸쳐 통로가 제법 정비되었을 것이다.

434년(눌지왕 22)에는 백성에게 우거지법(牛車之法)을 가르쳤다 하였으니 이것을 민간에 소달구지 사용을 장려한 것이라 해석한다면 부분적으로나마 꽤 큰 규격의 도로가 있지 않았나 추측되기도 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487년(소지왕 9) 역참제(驛站制)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우역(郵驛)의 설치와 관도(官道)의 치수(治修) 기록이다.

584년(진평왕 6)에는 육상 교통을 담당하는 기관인 승부(乘府)가 설치되고, 678년(문무왕 18)에는 해상 수송을 담당하는 선부(船府)가 설치되는 등 교통 체계가 제법 확립된 것 같다.

고구려는 북방 계통과 중국 계통의 문화가 전파되는 경로로서의 지리적 조건 때문에 삼국 중 가장 먼저 개화한 나라로서 서울을 5부로, 지방도 전국을 5부로 나누었다.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는 국내성과 평양, 그리고 지금의 서울에 3경을 둠으로써 3경을 잇는 간선, 5부를 연결하는 준간선, 그리고 각 중심성과 그 관할하에 있는 작은 성들과를 연결하는 지선으로 도로망이 조직되었으리라 짐작되나 그 구체적 기록이 없다.

그러나 고분의 벽화에 그려진 기마도(騎馬圖)나 귀인이 타던 소수레 등은 당시 길의 상태를 어느 정도는 짐작하게 한다.

백제는 한강 유역과 금강 유역을 장악하고 전국을 남·북·동·서의 4부로 행정 구역을 편제하였다가 웅천으로 천도한 뒤에는 왕도와 전국을 각각 5부씩으로 가르고, 왕도 5부는 5항(巷)씩, 전국 5부는 10군(郡)씩으로 갈라 편제하였으므로 이들 행정 구역 상호 간에 연결된 도로망을 상상할 수 있으나 역시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

고려 시대에는 995년(성종 14)에 10도(道)를 제정, 설치하였고 1173년(명종 3)에는 7도와 5도가 있다고 하였다. 이 중 5도는 북계(北界)의 운중도·흥화도(興化道)와 동계의 명주도(溟州道)·삭방도(朔方道)·연해도(沿海道)가 그것인데, 이 중 연해도를 제외한 나머지 4도는 역도(驛道)의 이름과 중복되는 것으로 이 때의 ‘도’는 길을 뜻하는 도와 행정 구역의 도를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의 길은 체계적인 역도로서 전국적으로 정비되었다. 22개의 역도는 대로·중로·소로의 3등급으로 가르고 모두 525개의 역참을 두었다. 역참은 다시 6과(科)로 등급을 나누어 1과에는 75인, 6과에는 7인 하는 식으로 등급에 따라 역정(驛丁)을 배치하였다.

길은 예로부터 우리 생활과 밀접하므로 길을 소재로 한 글이 많다. 먼저 우리 격언이나 속담에 나타난 길의 예를 찾아보면, ‘길로 가라 하니까 뫼로 간다.’, ‘길을 두고 뫼로 가랴.’, ‘길 닦아 놓으니 용천배기 먼저 간다.’, ‘시앗 싸움엔 길 아래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길을 알면 앞서 갈 것이지.’,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를 말라.’ 등이 있다.

고시조에 읊어진 길에는 이황(李滉)과 같이 도의(道義)의 뜻으로 쓴 길도 있고, 장만(張晩)과 같이 실체의 길을 뜻한 것도 있다. “고인도 날 못보고 나도 고인을 못뵈/고인을 못 뵈와도 예던(행하던) 길 앞에 있네/예던 길 앞에 있거니 아니 예고 어이리.”(이황),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구절양장(꼬불꼬불한 산길)이 물도곤 어려왜라/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갈기만 하리라.”(장만)

김동인(金東仁)의 단편 「배따라기」에는 주인공이 살아 있는 한 탐색이 계속되어야 하는 숙명의 길이 나타나 있다고 김용희(金鏞熙)는 분석하였다.

즉, 형수가 물에 빠져 죽은 데 대해 형에게 원망을 품고 떠나가는 아우의 육로는 구도자의 고행길이요, 형이 찾아 나서는 뱃길은 아내의 죽음에 대한 속죄의 길로서 여기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음을 암시하는 숙명이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인 장순하(張諄河)는 길을 제재로 한 시를 10여 편 연작으로 발표한 바 있는데 그 중 ‘길 시리즈 ②’라고 부제가 붙은 「지쳐 누운 길아」 한 편을 보기로 한다. 여기에 표현된 길은 실체로서의 길과 인생이라는 상징적인 길이 뒤섞여 나타나 있다.

“어디에나 길은 있고/어디에도 길은 없나니/노루며 까막까치/제 길을 열고 가듯/우리는 우리의 길을/헤쳐가야 하느니. //땀땀이 실밥 뜨듯/잇고 끊긴 오솔길/신발끈 고쳐 매며/한 굽이는 왔다마는/호오호 밤부엉이가/어둠을 재촉한다. //날 따라 다니느라/지쳐 길게 누운 길아/한심한 눈을 하고/한숨 몰아 쉬는 길아/십자가 건널목에는/신호등도 없어라.” →도로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대전회통(大典會通)』
『고지조집(古時調集)』
『한국도로사』(한국도로공사, 1980)
『현대문학』(19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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