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조선후기 학자 김덕함의 무덤. 신도비.
내용
조선시대 사대부 분묘의 예에 따라 묘는 2계절(階節)로 조성하였는데, 상계절은 사성(莎城 : 무덤 위의 반달모양의 토성)이 둘러진 봉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묘비를 설치한 반면, 하계절에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을 설치하였다. 또 봉분 앞 중앙에 상석을 2계절에 걸쳐서 놓았고, 계절석(階節石)은 상석의 좌우로 7개를 설치하였다.
묘비의 비신은 68×24×152㎝이고, 기대(基臺)는 155×71×20㎝의 규모이다. 건립연대는 후면이 마모되어 알 수 없지만, 비문은 박세채(朴世采)가 짓고 증손인 김유(金濡)가 썼다.
상석은 146×91×30㎝, 향로석은 34×32×38㎝의 규모로 4다리를 형식적으로 새겨 향탁(香卓)처럼 깎았다. 망주석의 높이는 160㎝로, 연봉머리 아래에 연당초문(蓮唐草文)과 6각을 이루는 기둥에는 다람쥐 한 마리씩을 양각하였다.
문인석은 50×36×150㎝의 규모로 금관조복(金冠朝服) 차림새에 홀(笏)을 들고 있는데, 조각된 얼굴 표정에서 생동감이 넘치는 등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신도비는 1686년(숙종 12)에 건립하였는데, 비신이 94×28×188㎝이고, 대좌는 147×92×60㎝이며, 대석은 3222×161×20㎝로 봉분에 비해 비교적 규모가 크다. 신도비의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전액(篆額)은 김수항(金壽恒)이 썼으며, 비문은 증손인 김유가 썼다. 대좌의 4면에는 당초문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새겼다. 묘역은 서강잠두(西江蠶頭)에 초빈(草殯)한 후 1637년(인조 15)경기도 광주 월천리로 이장하였다가 1660년(현종 1) 현재의 위치로 다시 이장하였다.
이 묘제는 조선중기 전형적인 사대부의 묘제 양식을 잘 보여주면서도 문양은 전통적인 방식을 보이는 등 조선시대 묘제 변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 『송자대전(宋子大全)』
- 『파주군지』(파주군, 1995)
- 『경기금석대관』(경기도, 1994)
- 『경기도인물지』(경기도, 1991)
- 『경기도문화재대관』(경기도, 1990)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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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무덤 앞에 향로를 올려놓는 네모반듯한 돌. 탁상 모양을 새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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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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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무덤 앞에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땅. 배계절(拜階節)보다 한 층 높게 되어 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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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조선 시대에 벼슬아치들이 입던 금관과 조복을 아울러 이르는 말. 문무백관이 조하(朝賀)나 경사 등에 입는 최상급의 공복(公服)이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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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전자체(篆字體)로 쓴 현판이나 비갈(碑碣)의 제액(題額).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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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사정상 장사를 속히 치르지 못하고 송장을 방 안에 둘 수 없을 때에, 한데나 의지간에 관을 놓고 이엉 따위로 그 위를 이어 눈비를 가릴 수 있도록 덮어 두는 일. 또는 그렇게 덮어 둔 것.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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