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준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형조참판, 동지춘추관, 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여수(汝秀)
휴암(休菴)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1년(명종 16)
사망 연도
1635년(인조 13)
본관
안동(安東)
주요 관직
형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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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형조참판, 동지춘추관, 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수(汝秀), 호는 휴암(休菴). 김번(金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김생해(金生海)이고, 아버지는 군기시정 김원효(金元孝)이며, 어머니는 이승열(李承說)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90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주서(注書)·대교(待敎)·병조좌랑을 거쳐 1595년 강원도어사로 파견되었다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직되었다.

1597년에 영광군수, 다음 해 호남조도사(湖南調度使), 1599년 내섬시정(內贍寺正)·공주목사, 1604년 해주목사(海州牧使)를 거쳐 이듬해 죽주목사(竹州牧使)를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동부승지를 지내고 좌부승지에 올라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우승지·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가 동지중추부사로 체직되어 부총관을 겸하였다. 다음 해 가의대부에 올라 형조참판이 되어 동지춘추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무고로 체포된 뒤 광해군의 친국(親鞫)을 받으면서 고문에 못 이겨, 김제남(金悌男)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다고 허위 진술해 삭출당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는 계축옥사 때 김제남을 모함한 죄로 길주(吉州)에 유배되고, 1627년 아산에 이배되었다가 1635년에 풀려나왔다. 1608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날 때 논의에 끝까지 참여하지 않아 광해군의 미움을 받고 쫓겨나, 11년 동안이나 벼슬에 기용되지 못했다.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즐겨 읽었고, 손수 『강목(綱目)』 20권의 목(目)을 초(抄)해서 『강감요략(綱鑑要略)』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요점을 담으면서도 자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글씨에도 능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백주집(白洲集)』
『청음집(淸陰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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