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악(樂) 또는 악(渥)으로도 표기한다. 신라·후백제·고려의 세 왕조에 걸쳐 활동하였다.
923년(경명왕 7)신라의 창부시랑(倉部侍郎)으로서 후당(後唐)에 조공사로 파견되었으며, 이듬해 역시 조산대부 창부시랑(朝散大夫倉部侍郎)으로 후당에 파견되어 후당의 장종(莊宗)으로부터 조의대부 시위위경(朝議大夫試胃衛尉卿)을 제수받았다. 그 뒤 후백제의 시랑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아마 신라정부의 사신으로서 중국을 내왕하던 도중에 후백제측에 붙잡히게 됨으로써 후백제의 관직을 가지게 된 것 같다.
930년(태조 13)에 고려 태조가 고창군(古昌郡)싸움에서 후백제의 군사를 크게 무찔렀을 때 고려측의 포로가 되었다. 이때는 김악(金渥)으로 나오는데, 876년에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했던 김악(金渥)과는 연대상으로 보아 동명이인으로 생각된다. 이후 고려의 원봉성학사(元鳳省學士)로서 중용되었으며, 943년 태조가 죽을 때 신덕전(神德殿)에 불려가 태조의 유조(遺詔)를 기초(起草)하였으며, 얼마 뒤 상정전(詳政殿)에서 국상(國喪)이 발표되자 유조를 선포하기도 하였다.
965년(광종 16)에 건립된 문경 봉암사(鳳巖寺)의 「정진대사원오탑비(靜眞大師圓悟塔碑)」에 의하면, 광종 4년(953) 이전까지 생존하였던 것이 확실해 보이며, 관등은 태상(太相), 관직은 수병부령(守兵部令)으로서 광종의 조서를 받들어 선포하기도 하였다. 신라시대에는 골품제도 때문에 육두품출신의 유학자로서 시랑직 이상 승진할 수 없었지만, 고려측에 포섭되어서는 재상의 지위까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