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분칠(粉七), 호는 향곡(香谷).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고향인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성내(城內)에서 살다가 경상남도 진주시 평거동으로 이사했으며, 그뒤 다시 서울 인의동과 봉천동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양금과 가야금 등의 악기와 판소리 및 시조를 배웠는데, 김봉이(金鳳伊)에게서 「심청가」를 배웠고, 정정렬(丁貞烈)에게서 오랫동안 「심청가」 · 「적벽가」 · 「춘향가」를 배웠다.
민족항일기에 레코드판에 판소리를 취입한 적이 있고, 조선성악연구회와 창극단에서 활동하였다. 민족항일기 말기에는 향곡(鄕谷)에 은거해 있다가 광복 뒤 다시 창극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60년대초 판소리계에 나와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1964년 12월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춘향가」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정정렬의 「춘향가」를 가장 순수하고 완벽하게 전창(全唱)하는 명창으로 평가받았으며, 박초선(朴初宣) · 최승희(崔承希) · 최영기(崔英基) · 정금내(鄭今乃)를 후계자로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