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부시랑(倉部侍郞)으로 있던 897년경에 하정사(賀正使)로 당나라에 갔다. 이때 최언위(崔彦위) 등 유학생 8인을 데리고 갔으며, 10년 기한이 다 된 학생 김의선(金義先)·최광우(崔匡祐) 등 4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도 일찍이 당나라에 가서 당나라의 빈공과에 합격하였음을 그의 관직이 조청랑 수정변부사마 사비어대(朝淸郞守定邊府司馬賜緋魚袋)인 데서 알 수 있는바, 이는 당나라의 관직이기 때문이다.
그 뒤 수금성군태수(守錦城郡太守)를 지냈으며, 장흥의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명(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銘)」 및 제천의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명(月光寺圓郞禪師大寶禪光塔碑銘)」은 모두 왕명을 받들어 그가 지은 것이다. 운봉의 「심원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深源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碑)」의 비문도 그가 지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