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있는 조선후기 문신 김익희의 무덤.
개설
내용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파의 한 사람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되었다. 1653년(효종 4) 노산군(魯山君)의 묘소에 제사지낼 것을 청하여 시행케 하기도 하였다. 1656년(효종 7) 대제학에 올라 명실공히 대학자로서 조선 중기 학문을 대표하였다.
봉분의 직경은 8m이고, 높이는 3m, 197㎝ ·119㎝ ·33㎝ 크기의 장석 좌우에 장대석을 4개씩 쌓아 묘역을 조성하였다. 봉분의 왼쪽에는 묘비가 있는데, 이수에는 두 마리의 용이 매우 특이한 수법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높이는 215㎝, 폭 82㎝이다. 봉분의 좌우에는 망주석 1쌍과높이 169㎝, 폭 50㎝, 두께 40㎝의 한 쌍의 문인석(文人石)이 있다.
창주사적공원 어귀에는 비각이 있다. 비각 안에는 신도비와 더불어 1기의 묘비가 있다. 묘소 우측에 있는 묘비는 근래 새로 조성한 것이고, 이곳에 있는 마모가 심한 묘비가 원래의 것이다.
신도비는 1712년(숙종 38) 11월에 건립된 것으로 규모는 높이 410㎝, 비신 높이 250㎝, 폭 93㎝, 두께 43㎝이다. 비문의 내용은 송시열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김수증(金壽增)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진규(金鎭圭)가 썼다. 묘 아래에는 재실(齋室) 긍사재(肯思齋)이 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한밭전통의 맥』3(대전광역시, 1992)
- 『문화유적총람』(문화재연구소, 문화재관리국, 1977)
- 「창주 김익희(1610~1656)의 정치활동」(지두환, 『한국학논총』 37, 2012)
- 「창주 김익희의 도의사상」(송인창, 『韓國思想史學』 20, 2003)
- 문화재청(www.cha.go.kr)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