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를 대표하는 문장가이자 서인계 정치인으로 활동한 문신 김익희와 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의 합장 묘소이다. 1989년 3월 18일에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광산김씨 창주공파 문중에서 창주사적공원으로 만들어 보존, 관리하고 있다.
김익희(金益熙, 1610∼1656)의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중문(仲文), 호는 창주(滄洲)이다.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장생(金長生)이고, 아버지는 김반(金槃)이다. 김반의 여섯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나 계곡(谿谷) 장유(張維)와 기옥(畸翁) 정홍명(鄭弘溟)에게 고문(古文)을 배웠다.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부정자 · 검열을 지내고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교리 · 제학 등을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에 올랐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파의 한 사람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되었다. 1653년(효종 4) 노산군(魯山君)의 묘소에 제사지낼 것을 청하여 시행케 하기도 하였다. 1656년(효종 7) 대제학에 올라 명실공히 대학자로서 조선 중기 학문을 대표하였다.
봉분의 직경은 8m이고, 높이는 3m, 197㎝ ·119㎝ ·33㎝ 크기의 장석 좌우에 장대석을 4개씩 쌓아 묘역을 조성하였다. 봉분의 왼쪽에는 묘비가 있는데, 이수에는 두 마리의 용이 매우 특이한 수법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높이는 215㎝, 폭 82㎝이다. 봉분의 좌우에는 망주석 1쌍과높이 169㎝, 폭 50㎝, 두께 40㎝의 한 쌍의 문인석(文人石)이 있다.
창주사적공원 어귀에는 비각이 있다. 비각 안에는 신도비와 더불어 1기의 묘비가 있다. 묘소 우측에 있는 묘비는 근래 새로 조성한 것이고, 이곳에 있는 마모가 심한 묘비가 원래의 것이다.
신도비는 1712년(숙종 38) 11월에 건립된 것으로 규모는 높이 410㎝, 비신 높이 250㎝, 폭 93㎝, 두께 43㎝이다. 비문의 내용은 송시열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김수증(金壽增)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진규(金鎭圭)가 썼다. 묘 아래에는 재실(齋室) 긍사재(肯思齋)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