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5책. 목활자본. 1801년(순조 1) 아들 한동(漢東), 종질 한사(漢師), 권성익(權聖翊) 등이 간행했고, 그 뒤 1910년에 다시 족현손(族玄孫) 의집(義集) 등이 「주서차록(朱書箚錄)」을 다른 문집에서 찾아내고, 거기에 서원 철향 때의 축문·제문 등을 합해 중간하였다. 권두에 정종로(鄭宗魯)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한사와 의집의 후지가 있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권1·2에 시 240수, 사(辭) 1편, 권3·4는 서(書) 70편, 권5는 잡저 2편, 서(序) 3편, 기 8편, 권6은 발 5편, 명 1편, 상량문 2편, 축제문 25편, 권7·8은 주서강록간보차의(朱書講錄刊補箚疑) 상·하, 권9는 묘갈명 2편, 음기(陰記) 1편, 묘표 2편, 행기(行記) 2편, 추지(追識) 2편, 권10은 부록으로 행장 11편, 묘갈명 1편, 봉안문 1편, 상향축문 1편, 제문 7편, 만사 1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저술을 남겨야 한다는 혹자의 말에 ‘송나라의 주부자(朱夫子: 주희)와 우리 나라의 이선생(李先生: 이황)이 다 말씀했는데, 그 위에 무엇을 더 말할 것인가?’라고 했을 정도로 이황의 학설을 추종하였다.
그는 「주서강록간보차의」에서도 『주서절요(朱書節要)』에 대해 제1편에서 20편까지 이황이 주해한 것을 다시 설명하는 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놓았다. 숫자에 관계되는 글자 한 자, 심지어 서신에서 상대에게 쓰는 호칭 하나까지도 세밀하게 논하였다.
저자는 이일승(李日昇)·이성유(李聖有) 등의 문목(問目)에 답한 서에서도 『중용』·『맹자』, 그리고 예설 등에 관해 거의 『주자대전』 또는 이황의 학설을 인용해 자신의 답을 증명하는 식으로 설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