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남형우(南亨祐).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뒤에 경기도 양평군과 서울에서 살았다. 14세 때부터 오명선 행중(吳明善行衆) · 안성 복만이패 · 이운선 행중(李雲仙行衆) 등을 따라다녔다.
조운서(曺雲瑞)로부터 꼭두각시놀음을 배웠고, 18세 때에는 최근선(崔根善)에게서 꼭두각시놀음을 배웠으며, 1934년부터 마지막 남사당패인 안성놀이패를 조직하여 전국을 유랑하였다.
꼭두각시놀음 · 상쇠 · 대잡이 · 탈놀이에 두루 뛰어났으며, 꼭두각시인형제작 및 탈 제작 기능도 지녀 1964년 12월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인 꼭두각시놀음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61년 제작한 덧뵈기탈은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 한국민속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민속극회 남사당의 이사장도 역임하여 남사당놀이를 오늘에 전하는 데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박첨지 마당(첫째 박첨지 유람거리, 둘째 피조리거리, 셋째 꼭두각시거리, 넷째 이시미거리), 평안감사 마당(첫째 매사냥거리, 둘째 상여거리, 셋째 절 짓고 허는 거리)의 두 마당 일곱 거리로 구성된 일명 「심우성본」(1989) 채록에 양도일과 함께 구술자로 참여했다.
후계자로 그의 처 박계순(朴桂順), 박용태(朴龍泰), 아들 기환(基煥)과 기문(基文) 등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