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진(伯珍), 호는 기봉(碁峰). 할아버지는 남득붕(南得朋)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이며, 어머니는 채성구(蔡聖龜)의 딸이다.
1681년(숙종 7) 진사에 합격하고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정치 일선에서 밀려난 송시열(宋時烈)의 복관을 상소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음보(蔭補)로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이어 사도시주부·호조좌랑·포천현감 등을 지냈다. 1689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기사환국으로 파직되었다. 그뒤 1694년 갑술옥사 때 다시 기용되어 지평·홍문관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헌납·사간 등을 거쳐 이조정랑·세자시강원 보덕을 거쳐 양양현감으로 나갔다. 1700년 동부승지·공조참의 등을 거쳐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하여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자청하였다가 부임도 하기 전에 충청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승정원으로 복귀하였다. 이듬해 광주부윤(廣州府尹)에 제수되었는데, 기사환국이 있던 해에 과거시험에 응시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탄핵을 받은 일로 자신이 거절하고 선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도 천안군수를 내렸으나 부임하지 않다가 능주목사(綾州牧使)로 한때 부임하였다. 문장에도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기봉집(碁峰集)』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