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는 조선시대 남녀 간의 자유스러운 접촉을 금하였던 관습 및 제도이다. 『예기』 내측 편에 부부간의 예의 혹은 소임 분담에 따른 공간 분리를 규정한 것에서 기원한다. 고려시대까지는 남녀 간에 비교적 자유로운 접촉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에 의하여 강요되는 행동 규제법의 의미가 포함되었다. 오늘날 통념적으로 이해하는 내외 관습은 조선 중기 이후에 확립된 것이다. 내외가 남녀 모두에게 해당하는 자율적인 관습에서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규제법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통해 조선 사회의 폐쇄성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내외의 관습이 일반화되지 않아 남녀간에 비교적 자유로운 접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내외의 관습법이 부녀자들의 일상생활에 실제로 영향을 미쳐 고려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폐쇄성을 띠게 되었다.
내외의 기원은 『예기(禮記)』 「내측편(內則篇)」 에 “예는 부부가 서로 삼가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니, 궁실을 지을 때 내외를 구별하여 남자는 밖에, 여자는 안에 거처하고, 궁문을 깊고 굳게 하여 남자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고, 여자는 임의로 나가지 않으며, 남자는 안의 일을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밖의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라고 한 예론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부부간의 예의 혹은 소임분담에 따른 공간분리를 규정한 것이었으며, 남녀 모두에게 해당하는 자율성을 전제로 한 관습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이와 같은 관습적인 성격 외에도 지배이념화한 성리학에 의하여 강요되는 행동규제법의 의미가 포함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내외는 관습과 법의 양측면에서 파악될 필요가 있다. 우선 조선시대의 가옥구조는 『예기』의 설을 따라 중문(中門)으로 내외사(內外舍)를 구분하고, 내사는 여자 중심의 생활공간으로, 외사는 남자 중심의 생활공간으로 하였다. 또한 남녀가 접촉할 때는 노비와 같은 매개인을 두었고, 가난하여 노비가 없을 경우는 서로 직접 마주보지 않고 가령 “사랑 양반 아니 계시다고 여쭈어라” 등과 같은 제3자를 사이에 둔 듯한 대화형식을 취하였다. 이와 같은 형태의 내외는 법적 제재가 따른 것은 아니지만, 관습으로 유지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 이외에 일상생활에 있어서 지켜져야 할 내외법이 존재하였다. 1431년(세종 13) 6월 대사헌 신개(申槩) 등이 올린 상소를 보면 양반부녀는 부모 · 친형제 · 친백숙부 · 이모 등을 제외하고는 찾아가서 만날 수 없다. 만약 이를 어기는 자는 실행(失行)으로 논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말하자면 여자들은 3촌까지의 친척 이외의 사람을 방문할 수 없도록 하였다. 또한 남녀는 길을 달리하고 저자도 함께 하지 않을 것, 모임에서 대청을 달리할 것 등의 규제법이 논의되었다.
물론 이러한 규제조항이 모두 법제화한 것은 아니고, 법적 제재가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는 조선시대 위정자들에 의해 요구된 관습 이상의 내외법이었다.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게 하고 가마를 타게 하는 것, 채붕나례(綵棚儺禮)와 같은 거리행사 구경을 금하는 것, 사찰 출입을 금지하는 것 등은 모두 개별적인 부녀생활 규제법으로 논의 되었다. 하지만 크게 보면 내외법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여자들의 생활을 철저히 폐쇄적으로 한 의도는 유교적인 의미에서 정절을 여자들이 지켜야 할 최우선적인 덕목으로 간주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자들의 문밖 출입 및 외부 사람들과의 접촉이 자유로우면 그만큼 정절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크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때 내외의 관습과 법이 제대로 구실을 하게 된 것은 16세기 후반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는 고려시대의 풍습이 지배적인 가운데, 새로운 관습이 의도적으로 보급되는 과도기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통념적으로 이해되는, 내외 관습과 관련된 조선시대의 사회상은 조선 중기 이후에 확립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이 확립된 이후로도 부녀자들 사이에는 예외적인 행위가 많이 행하여졌다. 그리고 그것이 불만해소의 배출구로서 위정자들에 의하여 묵인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여성 생활규제의 관습과 법 등은 양반계층, 즉 사족(士族) 부녀계층에 국한된 내용이었다.
이상과 같이 내외의 관습이 남녀 모두에게 해당하는 자율적인 관습에서 여성을 중점적 대상으로 한 규제법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통하여 조선사회의 폐쇄성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