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년(인조 5) 지방유림의 공론으로 이항복(李恒福)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이항복은 1617년(광해군 9)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북청으로 유배되어 유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는데, 이를 계기로 인조반정 후에 이항복이 신원(伸寃)되자 서원을 세우게 된 것이다.
1686년에는 이곳에 유배된 바 있었던 김덕성(金德誠)과 정홍익(鄭弘翼)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687년(숙종 13)에 ‘노덕(老德)’이라고 사액되었다. 1694년 민정중(閔鼎重)과 오두인(吳斗寅)을, 1708년에 이상진(李尙眞)과 이세화(李世華)를 추가 배향하였다.
이 서원은 처음의 제향자인 이항복이 서인계통(西人系統)의 인물이었으므로 함경도 내에서 서인계 당색(黨色)을 지닌 대표적인 서원이 되었으며, 따라서 인조 이후의 서인계 정권으로부터 특별한 후원과 물질적 지원을 받았다.
그 뒤 1741년(영조 17) 박문수(朴文秀)가 함경감사로 부임하여 이항복의 후손인 소론(少論)의 영수 이광좌(李光佐)를 이 서원에 추배하였다가 노론계(老論系)였던 예조판서 서종급(徐宗伋)의 탄핵을 받아 출향(黜享:종묘 또는 배향을 거두어 치움)된 적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숙종 40년 이후에 창건된 서원은 훼철하고 추향된 자는 출향하는 대대적인 서원의 정리가 단행되기도 하였다.
이 서원은 함경도에서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과 함께 대표적인 서원으로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왔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그 뒤 북청향교(北靑鄕校) 터에 옮겨졌다가 1908년에 승덕학교(承德學校)로, 1911년 이후에는 북청농업학교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