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1년(효종 2) 안방준(安邦俊)이 편집하였다. 권수에 안방준의 서문이 있다.
4권 4책. 필사본. 규장각 도서 및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권1은 평거언행(平居言行)·반정시사(反正時事)·치역논변(治逆論辨), 권2는 추숭논변(追崇論辨)·편당논변(偏黨論辨), 권3은 비어논변(備禦論辨)·강화논변(講和論辨), 권4에 잡설부록(雜說附錄), 별록으로 갑인함사(甲寅緘辭)·행장·신도비명·묘표·책훈교서(策勳敎書)·종묘배향교서(宗廟配享敎書)·치제문(致祭文)·묘소치제문(墓所致祭文)·성봉서원봉안문(盛峯書院奉安文)·소장서문(疏章序文)·삼연사청액소(三延祠請額疏)·오산남문창의비(鰲山南門倡義碑)·창의비제현위차(倡義碑諸賢位次)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평거언행」은 선조 때를 중심으로 엮은 것인데, 이귀(李貴)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으로서 그들의 영향을 받은 점, 그 두 사람이 동서분당(東西分黨)을 조정(調停)하다가 당시 사람들의 탄핵을 받았으나, 많은 선비들의 상소로 인해 선조가 참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내용, 임진왜란 당시 이귀의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으로서의 역할을 기록하였다. 그밖에 정인홍(鄭仁弘)과의 관계를 서술하였다.
「반정시사」에서는 인조반정을 도모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는 이이첨(李爾瞻)·정인홍이 인목대비(仁穆大妃)와 영창대군(永昌大君)의 폐립 논의에 대해 반대의 입장에 있었음을 설명했으며, 그도 광해군의 난정에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김류(金瑬)·김자점(金自點)·최명길(崔鳴吉) 등과 반정할 것을 의논해 능양군(綾陽君)을 옹립하고 광해군을 폐출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서술했으며, 특히 폐모가 있었던 서궁(西宮)의 상황을 잘 설명하였다. 또한 인조가 즉위한 이후의 논공행상에 얽힌 전말을 기록하였다.
「치역논변」에서는 반정 이후 폐인이 된 광해군 부자와 인성군(仁城君)에 대한 치죄(治罪)의 전말과 이괄(李适)의 반역 동기, 이와 관련된 인사들의 치죄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추숭논변」에서는 1624년(인조 2) 원종(元宗)을 추숭할 때부터 있었던 모든 예에 관한 행위를 논했는데, 상복제·제례 등에 대해 여러 가지 사례를 근거로 논변하고 있다.
「편당논변」에서는 인조반정 직후 경연관(經筵官)으로서 왕에게 편당을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비어논변」에서는 1623년 반정초에 국정이 문란함에 대해 왕이 대책을 묻자 그에 대답한 것이다. 부국강병을 위해 호패(號牌)·양전(量田)·군적(軍籍)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묘호란 때 초병(抄兵)의 이해와 적의 침략을 막기 위한 수화전(守和戰)의 삼책(三策)을 논변하였다.
「강화논변」에서는 1627년 정묘호란 때 임금을 모시고 강화도에 피난해 최명길과 같이 강화(講和)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당시 대간의 탄핵을 받았던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별록의 「갑인함사」는 1614년(광해군 6)에 정인홍 등이 그를 죽이려고 이이첨·박재(朴梓) 등을 사주, 그의 관직을 삭탈하자고 논계했는데, 그에 대해 함사로써 임금에게 변명한 내용이다.
이 책은 인조반정 전후사를 연구하는 데 참고가 되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