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밀양인 박천붕(朴天鵬)과 그 뒤 병자호란 때 선친의 유훈을 받들어 싸우다가 순사한 네 아들, 즉 장남 박원겸(朴元謙), 둘째 박인겸(朴仁謙), 셋째 박예겸(朴禮謙), 넷째 박의겸(朴義謙)의 충절을 기리고자 1748년(영조 24) 정려의 명을 받아 건립한 정각이다.
원래는 평장리 화암부락의 뒤편에 있었으나 1800년(정조 24)에 방화로 인해 소실된 후, 80여 년이 지난 1886년(고종 23)에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박천붕(1545∼1592)은 충청남도 연기군 북일면에서 태어나 조헌(趙憲)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27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의 막하에 들어가 그의 종사관이 되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청주싸움에서 끝내 전사하였다.
그 뒤 44년 뒤인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박천붕의 네 아들인 박원겸, 박인겸, 박예겸, 박의겸이 충청병사 이의배(李義培)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네 아들의 가족들이 남으로 피난을 내려오다가 대전면 화암부락에 이르러 정착하게 된 것이 이곳과 인연을 갖게 된 연유라 한다.
후일 충청도 유생과 전라도 유생들의 상신(上申)에 의해 1747년(영조 23)에 박천붕은 충근호성공신(忠謹扈聖功臣)에, 그리고 네 아들들은 모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증(追贈)되고, 정려를 명받게 되었다.
그러나 미처 정문을 건립하지 못하고 지내다 1891년(고종 28)에 박천붕의 고향인 충청도 연기와 후손들이 세거(世居:한 곳에서 대대로 살아감)하는 전라도 보성, 낙안, 광주 등지에 정문을 세울 수 있었다.
정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이며, 정각 내에는 신·구의 2비가 있다. 옛 비는 1886년기우만(奇宇萬)이 지은 것인데 1938년 일본 경찰들에 의해 연기의 비와 함께 깨뜨려지는 수난을 당해 훼손된 것이고, 새 비는 광복 이듬해(1946년)에 후손인 박동우(朴東萬) 등의 노력으로 옛 비의 내용을 그대로 다시 새겨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