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일성종합 대학 학술조사단에 의한 구월산성(九月山城) 일대의 조사발굴 때 이 유적도 발굴조사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주나라 호왕(虎王)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 단군(檀君)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기었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 때에는 장당경이 장장평(庄庄坪)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 유적지가 조선왕조 때까지 문화현에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현의 동쪽 15리에 있었고,『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현의 북쪽 10리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문헌들에서 장당경의 위치를 서로 달리 기록한 것은 문화현의 위치가 변하였기 때문이다.
문화현은 현재의 삼천군 고현리에 있었는데, 1520년(중종 15) 원래 읍이 철폐되고 현재 신천군 건산리로 옮겼다. 고현리에서 장장평까지는 동북으로 약 13리, 건산리에서는 북으로 약 12리 정도이고, 고산리와 건산리 사이도 약 10리 가량이어서 문헌기록과 별로 차이가 없다.
한편 장당경 주변의 구월산성은 고구려 때 쌓은 둘레 4km의 산성으로 경내 서쪽에 자리한 집터는 발굴 결과 고구려 궁터로 확인되었다. 다양한 유적이 발굴됨에 따라 북한은 문화유적 복구사업을 추진하여 단군대와 단군성동, 제2단군사당을 복원하고 구월산성, 패엽사도 원형대로 복원진행 중이다.
장당경일대에는 적색와당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면적은 동서로 약 4km, 남북 약 2km에 달하는 지역이다. 적색와당은 고구려시대의 집자리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와당류이고, 문양도 동일한 것들이다.
이외에도 고려상감청자 파편들과 고려 및 조선시대의 와편 및 일부 주초석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 유적은 문화고현유적과 더불어 고구려시대의 성곽과 관청, 감옥을 갖춘 지방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게 하고 고구려 궐구현 자리로 추정되는 유적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