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4∼755년 작. 자색(紫色) 닥종이에 금은니(金銀泥)로 채색. 세로 26㎝, 가로 23㎝. 1979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호암미술관 소장. 이 그림은 80권짜리 『화엄경』(唐譯 혹은 新譯華嚴經)을 필사(筆寫)한 두 축의 경권(經卷)과 함께 발견된 것이다. 사경(寫經)의 표지 그림으로 그려진 변상도이다.
두 축의 경권 중 한 축은 『화엄경』의 1권부터 필사한 것이다. 또 한 축은 43권부터 50권까지 필사한 것이다. 이 그림이 어느 축의 표지화로 그려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삭은 상태로 보아 아마도 43∼50권의 표지화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변상도는 안쪽과 바깥쪽에 모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안쪽에는 화엄경변상도인 이른바 7처9회도(七處九會圖)를, 바깥쪽에는 역사상(力士像) 및 보상화(寶相華)를 그렸다.
안쪽의 그림은 7처 9회도 가운데 제7회 보광명전(普光明殿)의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2층의 높은 전각(殿閣)이 있고, 전각 2층은 보수엽(寶樹葉)들이 감싸고 있다. 지붕 양 끝에는 처마·기왓골·수막새기와 등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주위에는 구름을 탄 천녀(天女)들이 떠 있어 1층 앞에서 설법하고 있는 부처님 일행을 찬탄하고 있다.
설법 장면은 중앙에 사자좌(獅子座) 위에 앉은 부처님이 보인다. 손 모양이나 팔의 장신구 등으로 미루어 보아 보살형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임을 알 수 있다. 왼쪽에는 머리 부분은 없어졌지만 설법하는 자세로 본존을 향하여 앉아 있는 보살상이 있다. 이는 이 경을 설하는 보현보살(普賢菩薩)로 생각된다. 오른쪽 장면[向左]은 보살들이 퍽 자유스러운 자세로 설법을 듣고 있다. 이들은 설법을 듣는 대중들로 보인다.
이와 같이 이 그림에서는 중심선을 따라 건물을 배치하였다. 그 선상에 본존인 비로자나불을, 그리고 왼쪽에는 보현보살을 조금 작게 묘사하고 오른쪽 보살은 보다 더 낮고도 작게 그리고 있다. 그래서 배치 구도나 크기 비례는 인물의 중요도에 따라 순서를 정하는 전통적 인물화 수법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불보살들의 형태는 매우 세련되고 우아하며 탄력 있는 수법이다. 이것은 얼굴이나 신체, 또는 손이나 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형태는 석굴암 감실보살상과 같은 8세기 중엽의 조각상들과 매우 닮은 이른바 이상주의적 사실주의 양식(寫實主義樣式)을 잘 보여준다.
필선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그대로 나타난다. 건물의 세부선이나 인물의 얼굴 윤곽 또는 신체 세부의 어느 선묘(線描)를 막론하고 우아하며 유려한 필치를 구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변상도의 바깥쪽에 그려진 역사상과 보상화문(寶相華文) 또한 앞면의 그림과 같이 이상주의적 사실주의 양식이 잘 구사되어 있다.
역사상은 석굴암 인왕상과 같은 인왕상임이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울퉁불퉁한 근육 표현, 자유로운 자세, 날카로운 손발 표현 등은 석굴암 인왕상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면서도 또한 매우 풍려하고 활달한 형태이다. 후대에 나타나는 도식적인 보상화문과는 다른 사실에 가까운 꽃 모양을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탄력적이면서도 유려한 필치를 구사할 수 있는 화가는 분명히 비범한 솜씨의 화가였음이 분명하다. 그 수법은 중국의 명화가인 고개지(顧愷之)나 장승요(張僧繇) 계통의 그림들과는 다른 수법이다. 새로운 신라 서체(新羅書體)의 전개와 궤를 같이하는 새로운 화법의 등장으로 보인다.
이 변상도가 감싸고 있는 경권의 끝에는 『화엄경』 사경의 제작에 관련된 여러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적은 발문(跋文)이 적혀 있다. 발문에 의하면 이 사경은 황룡사(皇龍寺)의 법사 연기(緣起)의 발원에 의하여 754년에 시작하여 755년에 완성한 것이다.
변상도는 의본(義本)·정득(丁得)·두오(豆烏)·광득(光得) 등이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은 연대가 확실한 통일신라시대의 유일한 그림으로서, 8세기 중엽 회화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