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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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조
개념
철 · 구리 · 주석 등 금속을 달구고 두드려 연장과 기구를 만드는 기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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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철 · 구리 · 주석 등 금속을 달구고 두드려 연장과 기구를 만드는 기술자.
내용

딱쇠, 대정장이, 성냥, 바지, 야장(冶匠), 철장(鐵匠)이라고도 하는 대장장이는 청동기의 출현과 동시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기록상 최초의 야장은 신라의 석탈해(昔脫解:탈해왕;신라의 제4대왕)였다.

신라에는 철유전(鐵鍮典), 축야방(築冶房)과 같은 관서가 있어 무기, 생활용품, 농기구 등을 제작하였으므로, 이미 많은 대장장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시대의 절에서는 불상과 종의 주조기술을 가진 사노(寺奴)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경국대전≫ 공전(工典)에는 서울에 192명, 지방에 458명의 야장, 즉 대장장이가 각 관서에 배치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숫자는 정확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조선 초기에는 야장이 부족하여 일반 군인과 포로로 잡은 왜인(倭人) 야장을 사역시키기도 하였다. 야장은 다시 유철장(鍮鐵匠), 주철장(鑄鐵匠), 수철장(水鐵匠)으로 나누고, 그 중 무쇠를 다루는 수철장은 대로야(大爐冶), 중로야(中爐冶), 소로야(小爐冶)로 나누어 각기 솔거인(率居人)을 거느렸다.

이와 같은 야장의 세분화는 금속가공기술 발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와서 대장장이라고 하면 수철장만을 일컫게 되었다. 그들 중 오직 관청수공업장에서만 사역하는 대장장이도 있었지만, 스스로 농기구 등을 만들어 장시(場市)에 상품으로 판매하거나 물물교환으로 생활하면서 관청의 사역에 때때로 응하던 자들이 많았다.

특히, 관청수공업이 붕괴되던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오히려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이었으며, 그들은 호조에 장세(匠稅)로 포 한 필을 납부하면 되었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는 장역(匠役)이 없어지지 않았고, 장세와 함께 큰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농기구의 생산을 촉진하기 위하여 장세를 면제하려는 정부의 논의도 있었다.

조선 전기 대장장이의 신분은 양인과 천인이었지만, 후기에 들어서는 거의 양인화하여 관청의 사역에서 벗어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대장장이라는 천대를 면하지는 못하였다.

그들의 작업장인 대장간에는 풀무와 화로가 기본적인 설비이고, 그밖에 모루, 메, 망치, 집게 등의 연장이 있었다.

작업과정을 살펴보면 풀무로 화로의 불을 피워 쇠를 달군 뒤 메질과 담금질을 계속한다. 그런 다음 만들 제품의 크기에 따라 시우쇠(쇠를 불려서 만든 쇠붙이의 하나)를 토막내는데, 이를 “깜을 잡는다.”고 한다. 깜을 잡은 뒤 화로에 넣어 풀무질로 쇠를 익혀서 수메(슴베:손잡이 속에 들어간 부분)를 들이고 다시 날을 괸다. 다음에 괸 날을 오그리고 다듬어 자루를 박는다.

전통적인 대장장이가 호미 하나를 만드는 시간은 줄잡아 한 시간이 걸리지만, 기계로 제작하면 한꺼번에 수십 개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대장장이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1970년대 이후 시골의 장에서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경국대전』
『역주경국대전』-주석편-(한우근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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