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쪽모양 동기 (대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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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괴정동 유적 출토 대쪽모양동기
대전 괴정동 유적 출토 대쪽모양동기
선사문화
유물
청동기시대 돌널무덤에서 출토된 칼손잡이나 대나무를 쪼갠 듯한 모양의 청동기.
이칭
이칭
검파형동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청동기시대 돌널무덤에서 출토된 칼손잡이나 대나무를 쪼갠 듯한 모양의 청동기.
개설

‘검파형동기(劍把形銅器)’라고도 한다.

두 마디의 대나무를 세로로 쪼개놓은 형태로 표면에 평행세선문(平行細線文)과 점선문(點線文) 등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기고 반원형 꼭지〔鈕〕에 세 가닥의 굵은 실을 꼬아 만든 고리〔絡繩形鐶〕를 위아래에 붙인 유물이다. 모양이 검(劍)의 자루와 같으므로 검파형동기라고도 부르나 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모두 9개로, 대전광역시 서구 괴정동,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 남성리,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에서 각각 3점씩 출토되었다. 이들은 전체적인 형태와 기하학적인 문양구성은 같으나 세부의 문양 배치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난다.

내용
  1. 괴정동 돌널무덤 출토유물

1967년괴정동의 얕은 언덕에서 발견되었다. 지하 2.7m의 깊이에 바닥을 둔 남북방향의 석관묘에서 10점에 달하는 청동기와 돌살촉 3점, 천하석제(天河石製) 곱은옥 2점, 덧띠토기〔粘土帶土器〕 1점, 흑도장경호(黑陶長頸壺) 1점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대쪽모양동기는 석관묘 바닥 북쪽 끝에 놓였던 토기의 남쪽에 동서방향으로 3점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것이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것이다.

평면형태는 세로로 세워놓았을 때 허리가 잘록한 두 마디의 대나무를 가른 모양으로 한 쪽 변이 길고 옆에서 보면 가운데 마디가 위로 솟아 불룩하다.

문양은 가운데 마디를 경계로 위아래 2구(區)로 구분된다. 각 구마다 주위의 윤곽과 병행해 직사각형으로 구획한 이중선문대〔複條線文帶〕를 둘렀다. 또 구내의 상부에 치우쳐 각각 반원형의 꼭지를 붙이고 고리를 달았다. 이중선문대의 바깥을 사행세선(斜行細線)으로 메우고 안쪽을 3열의 점선문이나 그물모양의 격자문으로 구성하였다.

뒷면에는 위아래 두 곳에 반원형의 꼭지를 붙였는데, 2점은 마디의 가운데 붙이고 1점은 양 끝에 붙였다.

3점 모두 서로 다른 틀(鎔笵)로 주조한 것으로 길이는 각각 22.1㎝, 22.7㎝, 23.3㎝ 등이다.

  1. 남성리 돌널무덤 출토유물

1976년 2월남성리 40-3번지 높이 30∼40m의 언덕 과수원에서 우물공사를 하던 중 발견되었다. 깊이 2m에서 바닥이 나타나고 동서방향으로, 모두 17점의 각종 청동기와 천하석제 곱은옥 1점, 대롱옥〔管玉〕 103점, 덧띠토기·흑도장경호가 각각 1점씩 발견되었다. 대쪽모양동기는 괴정동출토품에 비해 약간 길고 상단이 훨씬 과장되어 있다.

문양은 전자와 같은 평행세선문과 3열의 점선문으로 직사각형의 문양대를 만들었는데, 꼭지 주위에 새긴 세선문양이 차이가 난다. 특히, 꼭지 위에 동물이 새겨져 있는 것이 있는데, 몸체는 점선으로 표시하였고 뿔이 당나귀의 귀처럼 생겼으나 꼬리가 짧은 것으로 보아 사슴인 듯하다. 이로써 끝의 너비가 넓은 쪽이 위쪽에 해당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3점 모두 뒷면에 꼭지가 붙어 있는데, 괴정동과는 달리 상단에 2개, 하단에 1개가 붙어 있으며, 뒷면의 가장자리에 4, 5줄의 섬세한 돌선(突線)이 둘러져 있다. 괴정동에서 보인 격자문은 없어지고 문양이 보다 세련되고 섬세하다.

역시 서로 다른 틀로 주조하였으며, 길이는 각각 24.8㎝, 25.0㎝, 25.4㎝이다.

  1. 동서리 돌널무덤 출토유물

1978년 4월예산 예당(禮唐) 저수지 동쪽, 봉수산(鳳首山) 기슭 높이 150m 지점에서 사방공사 중 발견되었다. 역시 석관묘 유적으로 지하 60㎝ 쯤에서 나무뚜껑을 한 동서방향의 유구(遺構)였다. 유물의 배치상태는 이미 교란되어 알 수 없으나 20점의 청동기, 대롱옥, 옥류 126점, 돌살촉 7점, 흑도장경호 1점, 덧띠토기 1점이 같이 출토되었다. 대쪽모양동기는 완형 1점과 반쯤만 남은 2개분이 발견되었다.

모두 형태와 문양구성이 같다. 반원형의 꼭지에 평행세선문이 시문되어 있고, 완형의 윗부분에는 작은 반점으로 오른손의 표면을 표현하였으며, 아래쪽은 꼭지의 위아래에 평행세선문을 시문하였다.

뒷면 위아래에 각각 2개, 1개의 꼭지를 단 것은 남성리와 같다. 나머지 2점의 고리 아래에는 긴 삼각형 구획 안에 톱니무늬〔鋸齒文〕와 평행세선으로 채웠다.

3점 모두 다른 틀로 제작하였으며 크기는 완형이 24.5㎝이다.

  1. 용도

대쪽모양동기는 모두 뒷면에 고리를 가지고 있어 다른 물체에 맬 수 있게 되어 있으며, 표면에도 꼴무늬〔絡繩文〕 고리가 달려 있다. 함께 출토된 청동기는 대부분이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들인데, 당시 청동기사회의 의식의 주관자들이 휴대했던 의기(儀器)로 알려져 있다. 또한 한 유적에서 3점씩만 출토되는 사실은 특수한 착장법(着裝法)에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의식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1. 연대

세 유적 모두 석관묘로서 청동기시대에 속하나 반출유물로 보아 약간의 시간적 차이가 난다. 즉, 괴정동에서는 요령식(遼寧式) 동검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Ⅰ식 세형동검(細形銅劍)과 조문경(粗文鏡)이 나오면서 대쪽모양동기의 문양이 남성리나 동서리보다 약간 거칠다.

또 남성리와 동서리에서는 시대가 보다 내려오는 Ⅱ식 세형동검이 출토되어 괴정동보다는 늦으나, 동서리에서는 남성리에서 보이지 않는 세문경(細文鏡)이 출토되는 점에서 남성리가 약간 이르다. 그러나 큰 시간적 차이는 없다.

절대연대로 본다면, 한반도에서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주조되기 시작한 서기전 4세기 말에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2세기 중엽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섬세한 세선문과 낙승문(絡繩文)고리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청동주조기술이 최고도에 달했던 때이다.

의의와 평가

형태와 기본적인 문양구성에 강한 전통을 가지면서 모두 석관묘라는 단일유구에서 출토되고 아직까지는 충청도 일대에서만 발견된다. 이 점에서 금강유역에 분포되어 있는 독특한 청동기문화영역을 설정할 수 있다.

일본에서 3종의 신기(神器)라는 거울·칼·옥을 반출하고 있는 사실은 이 유적·유물이 종교적인 신앙이나 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

특히, 동서리에서 반출된 나팔모양동기는 단면이 납작한 돌살촉과 흑도장경호와 함께 요령지방에도 보이지만, 덧띠토기는 한강 이남에만 분포되어 있는 점으로 볼 때, 이 유적은 토착세력이 북방청동기문화를 받아들여 토착화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남성리석관묘(南城里石棺墓)』(한병삼·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 1977)
『토기와 청동기』(한병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국립박물관학술자료집(國立博物館學術資料集)』 1-청동유물도록(靑銅遺物圖錄)-(국립박물관, 1968)
「예산동서리석관묘출토청동일괄유물(禮山東西里石棺墓出土靑銅一括遺物)」(지건길, 『백제연구(百濟硏究)』9,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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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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