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산 ()

촌락
개념
마을이나 동리(洞里)에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산.
이칭
이칭
동유림(洞有林), 동네산,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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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동리산은 마을이나 동리(洞里)에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산이다. 동리산은 마을 부근에 있는 작은 산이나 언덕을 말하기도 하고,마을 또는 동리에서 소유한 산을 일컫기도 한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연료와 비료의 원천이었을 뿐 아니라 건축재, 생활 물자, 분묘, 산전 개간 등을 산림에 의지했기 때문에 마을의 공동 자산으로 중요했다. 그러나 산업사회 이후 연료와 비료 체계의 변화로 동산은 매각의 과정을 거쳐 소멸된다. 그 결과 현재 동산을 보유한 마을은 단지 공동 자산의 가치만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의
마을이나 동리(洞里)에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산.
유래

동리산(洞里山)은 동답(洞畓)과 더불어 생활 문화를 공유하는 마을의 대표적인 공동 재산이다. 그 명칭은 ‘동산’, ‘동유림(洞有林)’, ‘동네산’ 등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동리산의 유래는 농업을 근간으로 삶을 영위하던 전통 사회에서 공리지(公利地)의 확보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조선 초기까지도 산림의 사유화는 금령(禁令)에 의해 엄격히 불허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인구의 증가와 권세가들의 사점(私占)으로 인해 백성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용 산림의 면적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는 산림의 황폐화를 초래하였으며, 땔감과 비료 수급의 불균형을 가져왔다. 사실 화목과 비료는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였다. 때문에 백성들은 관으로부터 산림의 점유권을 입안(立案) 받거나 매입하는 방식으로 확보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산림의 보호와 이용을 목적으로 조직된 송계(松契)가 출현한 배경이고, 동산의 시원이라 할 수 있다.

동산과 송계산

동산과 송계산은 소유와 관리의 측면에서 유사하면서도 일정한 차이가 있다. 즉 송계산은 계의 형태를 띤 조직에서 금양수호(禁養守護)를 담당하는 것이 관례이다. 지난날 송계의 범주는 하나의 자연촌 단위의 독송계(獨松契)에서 2개 마을 이상의 양동송계(兩洞松契)나 삼동송계(三洞松契), 오동송계(五洞松契) 및 수십 개의 마을이 가입한 연합송계(聯合松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여 준다. 따라서 송계산은 산림을 이용하는 마을이 공동으로 관리를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에 동산은 대체로 한 마을이 단독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공동체의 대소사를 주관하는 동계(洞契)나 대동계(大洞契), 대동회(大洞會) 등이 소유권 및 관리의 주체가 된다.

기능 및 운용

동산은 전통 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을의 구성원들에게 안정적인 화목산지(火木産地)와 비료의 제공처일 뿐 아니라, 공동생활에 필수적인 분묘와 경작지 확보, 건축재 및 생활 물자 등이 산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림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마을은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산을 밑천으로 생활하니 꼴이며 땔나무며 울타리와 산전(山田) 개간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는즉, 가히 목숨과 관계되는 것입니다.”라고 언급될 정도였다. 조선 후기 촌락 사회에서 산림의 소유권을 놓고 첨예한 산송(山訟)이 급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산의 운용은 마을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대개는 자치 규약을 정하여 일정한 금제(禁制)하에 공동으로 이용한다. 이를 위해 도벌이나 남벌 및 사사로운 임산물 채취를 단속하는 산림유사(山林有事) 및 송유사(松有事), 순산원(巡山員) 등의 역원을 두기도 한다. 촌락 사회에서 동산은 마을 운영을 위한 동중재원(洞中財源)의 긴요한 토대이다. 주된 수입원은 산전과 다랑이논의 도조(賭租)를 비롯하여 임목의 벌채와 임산물 채취, 입장(入葬) 수입 등이다. 이를 위해 산림녹화의 중요성이 부각되던 시기에는 정부의 산림 정책에 따라 산림계(山林契)를 조직하고, 낙엽송이나 흑송, 참나무, 아까시나무 등의 조림(造林)에 힘쓰기도 하였다.

변천 사항

동산은 일제강점기에 전환기를 맞이한다. 특히 1908년 「삼림법」 및 1917년부터 1935년까지 진행된 ‘임야조사사업’은 산림에 대한 근대적 등기 제도가 성립되는 계기를 가져왔다. 그 결과 오랜 연고권을 갖고 있던 동산과 송계산은 수탈의 대상이 되어 국유임야로 편입되거나, 사정(査定) 및 재사정(再査定)을 거쳐 몇몇 유력자의 단독 혹은 공동 명의로 설정되었다. 따라서 소유권이 확정된 산림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분쟁의 소지를 내포한 불완전한 산림 구조를 갖게 되었으며, 이는 훗날 동산의 소유권이 마을에서 개인으로 넘어가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더구나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연료 및 비료 체계의 변화와 함께 효용 가치를 상실한 많은 동산은 매각되어 동네 안의 긴급사에 사용하거나 호당 분배한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현재도 각 지역에서 동산을 보유한 마을이 적지 않지만 단지 공동 자산의 가치만 남게 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전영우, 『산림문화론』(국민대학교출판부, 1997)
산림청, 『한국임정50년사』(1997)
강성복, 「송계의 전승현장과 민속문화」(『민속문화의 자료와 현장』, 집문당, 2003)
강성복, 「일제하 해방이후 송계 연구」(『마을생활』, 민속원, 2010)

논문

강성복, 「계룡산 국사봉 주변마을의 송계 관행」(『민속학연구』 24, 국립민속박물관, 2009)
심희기, 「조선후기 토지소유에 관한 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전경목, 「조선후기 산송연구-18~19세기를 중심으로」(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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