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송 ()

조선시대사
제도
분묘 및 분묘 주변의 산지를 대상으로 하는 소송.
내용 요약

산송은 분묘 및 분묘 주변의 산지를 대상으로 하는 소송이다. 노비·전답 소송과 함께 3대 사송(詞訟)의 하나로 묘지 소송이라고도 한다. 16세기 이후 부계 분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묘지 풍수의 유행으로 길지를 확보하기 위한 사회적 욕구가 증대하였다. 길지를 찾는 과정에서 투장(偸葬)과 늑장(勒葬), 유장(誘葬) 등이 일어났다. 타인의 분묘를 훼손하는 것을 엄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투장이 발생하면 분묘가 위치한 고을 수령에게 소송을 제기하여 판결을 받아야 했다. 산림 생산물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 등 산림의 경제성이 증대되면서 점차 사회 문제로 확산되었다.

정의
분묘 및 분묘 주변의 산지를 대상으로 하는 소송.
개설

산송(山訟)은 일명 ‘묘지 소송’으로, 노비·전답 소송과 함께 조선시대의 3대 사송(詞訟)의 하나이다. 특히 16세기 이후 성리학적 의례의 정착과 종법 질서의 확립 과정에서 부계 분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등장하여 조선 후기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조상의 분묘를 수호하는 사대부가로 산송을 겪지 않은 집안이 드물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내용

조선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분묘의 규모와 경계를 법제적으로 규정하였다. 종친 1품은 사면(四面) 각 100보(步), 2품은 90보, 3품은 80보, 4품은 70보, 5품은 60보로 한정하였다. 문무관은 종친에 비하여 10보씩 체감하여 1품은 90보, 2품은 80보, 3품은 70보, 4품은 60보, 5품은 50보, 6품 이하 및 생원·진사, 유음 자제(有蔭子弟)는 동일하게 40보로 한정하였다. 범위 내에 다른 사람이 침범하여 경작이나 방목(放牧) 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분묘를 조성하면 투장(偸葬)이라 하여 금장(禁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종법 의식이 확립되면서 사대부들은 『주자가례(朱子家禮)』의 택지관(擇地觀)에 근거하여 묘지 풍수를 중시하였다. 지세의 흐름을 고려하지 않은 산술적인 거리 개념인 『경국대전』의 보수(步數) 규정은 외면하고 대신 분묘를 둘러싼 산줄기의 흐름을 따라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를 수호 영역으로 확보하면서 분산의 규모를 확대해 갔다. 용호수호(龍虎守護)는 법제적인 보수를 초과하는 불법적인 광점(廣占)이었으나 사대부들은 관철시켜갔다. 숙종 대에 이르면 결국 국가에서도 현실을 수용하여 1676년(숙종 2) 용호수호를 공인하고 영조대 『속대전(續大典)』에 정식 법조항으로 수록하였다. 그 결과 『경국대전』의 보수를 벗어나도 용호 안에 해당하는 구역이면 금장 대상이었고, 특히 용호 수호는 지세의 흐름을 중시한 주관적인 개념이었기 때문에 산송이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분묘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길지(吉地) 확보를 위한 사회적 욕구가 증대하였다. 상을 당하면 지사(地師)를 동원하여 길지를 찾아 헤매고, 이미 장례를 치룬 분묘라도 길지를 찾아 이장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묘지에 불법적으로 투장(偸葬)하는 부작용들이 속출하였고, 이는 분산 규모의 확대와 함께 산송의 주요 배경을 형성하였다.

현상적으로 볼 때, 산송은 불법적으로 타인의 묘역에 입장하는 투장과 이를 막으려는 금장의 충돌로 표출되었다. 투장은 『속대전』에서 투장, 늑장(勒葬), 유장(誘葬)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투장이 타인의 묘역에 불법적으로 입장(入葬) 하는 행위를 포괄적으로 지칭한다면, 늑장은 자신의 호강한 세력을 믿고 금장자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힘으로 밀어붙여서 입장하는 행위이며, 유장은 금장자의 가족이나 족친을 꾀어서 입장을 시도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밖에도 남의 이목을 피하여 몰래 투장하는 암장(暗葬), 한밤중에 어둠을 틈타서 투장하는 승야투장(乘夜偸葬), 투장 사실이 발각되지 않도록 봉분을 조성하지 않고 평지처럼 만드는 평장(平葬) 등이 있는데, 특성상 힘없는 자나 하층민들이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일단 투장이 발생하면 금장자는 분묘가 위치한 고을 수령[山在官]에게 산송을 제기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타인의 분묘를 훼손하는 것을 엄금하여 유배형에 처하였다. 따라서 불법적인 투장이라도 금장자가 자의적으로 투장묘를 파낼 수 없었고, 관에 소송을 제기하여 법적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 산송이 접수되면, 소송관은 소송당사자들과 직접 현장에 가거나 대리인을 보내 분묘들의 관계와 위치를 파악하여 산도(山圖)를 작성하고 이에 근거하여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산송은 판결이 내린 뒤에 오히려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특성을 보인다. 금장자가 패소하여도 승복하지 않고 상급 관청에 호소하고 정소자(呈訴者)를 바꾸어가면서까지 계속 소송을 제기하였고, 투장자가 패소하여도 묘를 파내지 않고 계속 버티었다. 특히 투장자들은 묘를 파내지 않기 위해 다양한 명분들을 제시하였는데, 동절기에는 땅이 얼어서 묘를 파낼 수 없고, 3월과 9월은 풍수상 묘를 이장하지 않는다는 속설을 내세웠다. 하지부터 추분까지의 농번기에는 관청에서 아예 소송을 중단하였다. 때문에 일 년 중 투장묘를 파낼 수 있는 기간은 실제로 얼마 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산송은 한번 발생하면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부지하세월로 지연되기 마련이었다. 또한 조상의 분묘에 관련되는 사안이었으므로, 개인의 차원을 넘어 가문 간의 대결로 치닫고 무력 행위까지 동원하였다. 향촌에서 해결되지 않으면 상경정소(上京呈訴)로 이어져 국왕에게 상언·격쟁하는 것도 불사하였고, 극단적으로는 관의 허락 없이 투장묘를 파내버리는 사굴(私掘)까지 감행하였다. 이 같은 체송(滯訟)과 격송(激訟)은 조선 후기 산송의 주요 특징을 이루고 있다.

변천과 현황

18세기 후반 이후 유교적 상장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하층민들 사이에서도 부모의 상장례를 성대히 치루고자 하는 욕구가 높아졌다. 이는 풍수설과 결합하여 북망산을 벗어나 독립 분산이나 길지를 확보하려는 의지로 표출되었다. 이와 함께 분산의 매매(賣買), 투작(偸斫), 촌락공동체의 송계산(松契山) 등 새로운 문제들이 대두하면서 산송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다양화해져 갔다. 특히 투작은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동을 바탕으로 산림의 경제성이 증대하면서 사회 문제화되었다. 분산 수호자는 분산 내의 목재, 시초(柴草) 등 산림 생산물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였다. 조선 후기 온돌의 보급에 따른 땔나무 수요 급증, 건축·선박·관곽(棺槨) 제작용 목재 및 자염(煮鹽)·광산·숯을 굽기 위한 목재 수요의 증가 등으로 타인의 산을 침범해 송추(松楸)를 베어가는 투작이 성행하면서 산림은 황폐화해져 갔다. 이에 따라 송추 투작은 ‘송송(松訟)’이라 하여 산송의 한 축을 형성하였다.

의의와 평가

산송은 성리학적 이념에 근거한 종법 질서의 산물로,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가 총체적으로 반영된 역사적 현상이다. 소송장에 드나드는 것 자체를 명예롭게 여기지 않은 성리학 사회에서 사대부들이 복상(服喪) 중에도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유일한 소송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산송은 조선 후기 사회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주요 매개로서 중요성이 높다 하겠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조선의 묘지 소송』(김경숙, 문학동네, 2012)
「조선후기 산송연구」(전경목,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조선후기 산송과 산림소유권의 실태」(김선경, 『동방학지』77·78·79,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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