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회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유암총서』, 『운곡잡저』 등을 저술한 학자.
이칭
이칭
굉보(紘甫), 운곡(雲谷)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89년(정조 13)
사망 연도
미상
본관
광주(廣州)
출생지
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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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조선 후기에, 『유암총서』, 『운곡잡저』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이강회는 형 이유회(李維會)와 함께 정약용(丁若鏞)의 문인으로, 다신계(茶信契) 계원이다. 1818년(순조 18) 우이도에 들어가 『유암총서』, 『운곡잡저』 등을 저술하였다.

생애

이강회(李綱會, 1789〜?)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굉보(紘甫), 호는 운곡(雲谷)으로, 이보만(李保晩)의 5대손이다. 이보만은 윤선도(尹善道)의 사위로, 보길도에 은거한 장인을 따라 강진에 입향하였다. 이후 그의 자손들이 그곳에 세거하게 되면서 이강회 또한 강진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다.

그는 강진에 유배 온 정약용(丁若鏞)의 제자가 되어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의 교감 작업 등 스승 정약용의 저술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는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가 그만두고 경학과 예학을 연구하였고, 정약용이 해배된 1818년(순조 18)에 신안면 도초면 우이도로 들어가 학문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다만 정약용이 사망하던 날, 서울에 있던 그가 큰 집이 기울어 덮치는 꿈을 꾸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활동사항

이강회는 정약용이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자, 곧 우이도로 들어갔다. 이후 그곳에 머물면서 스승 정약용의 학문을 계승하여 저술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이때 두 권의 문집을 집대성하게 되었는데, 바로『유암총서(柳菴叢書)』와 『운곡잡저(雲谷雜櫡)』등이다. 이 책들에는 자신의 저술 뿐만 아니라 정약전·정약용 형제의 저술도 포함하고 있는데,조선 후기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의 흐름을 밝힐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유암총서』「표해시말」에는 선박 제도 및 수레 유통, 그리고 정약전이 기록한 어부 문순득(文淳得)의 표류 행적을 수록하였다. 문순득은 항해 도중 표류하여 필리핀, 중국 대륙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귀향한 사람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조선과 항해 기술에 대한 그의 관심을 찾아볼 수 있다. 『운곡잡저』에는 정약전의 「송정사의(松政私議)」 및 정약용의 「백언시(百諺詩)」를 수록하고 있다.

참고문헌

『유암총서(柳菴叢書)』
『운곡잡저(雲谷雜櫡)』
「다산 제자 이강회의 이용후생학: 선설, 차설을 중심으로」(안대회, 『한국실학연구』 10,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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