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의 면적은 약 1만㎡이다. 유적은 묵호역에서 영동선 철도를 따라 사문재 쪽으로 약 300∼400m 올라가면 해발 20∼30m 정도의 낮은 구릉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묵호역 앞과 사문재를 연결하는 직선도로가 유적을 관통해 놓여 있고, 주변 일대에는 택지지역이어서 원래의 지형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 이 유적은 1994년 8월 도로공사 중 발견되어 1995년 5월 25일부터 3개월간 발굴조사 되었다.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는 모두 520점이 수습되었다. 이 중 석기로 분류될 만한 것들은 236점이었으며, 뚜르개 등의 소형 석기는 많은 양이 출토되었다. 석기제작에 사용된 돌감은 차돌이 516점으로 대부분을 차지하며 사암 3점, 응회암 1점도 사용되었다. 차돌이 석기제작에 대다수 사용된 것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유적은 현재 우리나라의 동해안에서 발견된 유적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동해안의 중부지역인 발한동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됨에 따라 당시 인류들이 동해안지역에 많이 거주하였고, 그들이 동해안을 끼고 빈번히 이동하면서 생활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의 일부가 빙하기(특히 제4빙하기) 때 남하해 우리나라 동남해안지역과 쓰시마(對馬島) · 일본열도의 큐슈(九州)를 연결하는 육로를 이용해 이주했을 가능성이 입증되었다.
이 유적의 연대가 10만 년 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의 중기 · 후기 구석기시대 사람과 문화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유적의 연대는 홍적세 후기인 제3빙하기와 제4빙하기 사이의 간빙기(Riss-Wurm Interglacial)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층과 문화층의 위치가 간빙기(12만 5,000B.P) 때의 가장 따뜻한 기후에 형성된 모래자갈층의 바로 윗부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문화층을 만들었던 시기는 9만∼12만 B.P의 어느 시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당시의 수면은 현재보다 10m 정도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 유적에 가까운 지역까지 해안선이 들어왔다고 생각된다. 발한동의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먹을거리로 바로 옆의 바다에서 영양분이 있는 어류와 패조류를 채취했을 것이다. 주위의 자연환경도 지금보다는 좀더 따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수면이 상승했음은 물론이고, 동 · 식물상도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것들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유적은 현재 해발 10m∼22m에 이르는 비탈진 경사면에 살림터를 마련하였으며 가장 높은 생활지역은 편평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생활면에서는 큰 모루돌이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었고 석기 제작공구로 사용했을 망치돌 · 쪼으개 · 떼개 등이 발굴되었다. 망치돌 중에는 바닷가에서 주워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갈돌이 있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바닷가에 나가 생활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발한동 구석기인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지역에 집자리를 마련하고 그 집을 중심으로 의 · 식 · 주문제을 해결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의 성격으로 보면, 북한강유역 양구 상무룡리 구석기시대 유적의 중기 구석기시대 문화층(약 7∼9만)에서 출토된 구석기의 형태나 제작수법이 거칠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구석기시대 유적의 석기들보다 덜 발달된 양상을 갖고 있다. 석기를 만드는데 사용된 암질은 대부분 차돌(99.23%)인 것으로 보아 차돌은 이 유적의 사람들이 구하기 쉬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차돌은 생활면이 있었던 석층 위에서도 많이 얻을 수 있었을 것이고, 바닷가에서도 주워왔을 것이다.
이 유적의 제일 아래 문화층은 중기 구석기시대 초기 유적으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이 유적은 동해안에서 이미 발견되었거나 앞으로 밝혀질 구석기시대 유적들의 표준유적이 되어 한국 구석기 유적들의 편년체계를 세우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