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명안공주는 현종과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현종은 명선(明善)·명혜(明惠)·명안공주 등 세 공주를 두었는데, 명안공주의 언니가 되는 두 공주는 모두 일찍 사거(死去)하였다. 이 때문에 명안공주는 현종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숙종과는 남매지간으로, 1679년(숙종 5) 판서 오두인(吳斗寅)의 아들인 오태주(吳泰周)와 혼인하였다.
오태주는 조지서제조(造紙署提調)·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 등을 지냈는데, 1689년 희빈 장씨(禧嬪張氏) 소생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는 숙종과 남인(南人)들에 대하여 노론(老論)의 송시열(宋時烈) 등이 반대운동을 일으키자 이에 동조하여 책봉을 반대하는 의견을 상계하였다가 관작이 삭탈되었으나 곧 환급되었다.
글씨, 특히 예서에 능하여 왕실의 옥책(玉冊)과 신판(神板)·유지(幽誌)를 많이 썼으며, 시문에도 능하여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명안공주 관련유물은 고문서와 유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총 4건 45점에 달한다. 고문서류로는 현종과 명성왕후·숙종의 한글 편지, 숙종의 한글 글씨를 모은 어필첩(御筆帖), 명안공주의 부(夫) 해창위(海昌尉) 오태주와 그 후손들의 글씨를 모은 수양전세유묵첩(首陽傳世遺墨帖), 영조의 수연(壽宴)을 맞아 만수무강을 기원한 계사진연경운록(癸巳進宴庚韻錄), 명안궁의 유물로 보이는 육필천자문(肉筆千字文), 명안궁노복로말(明安宮奴福老末)의 이름으로 영의정과 관찰사에게 올린 진정서, 숙종 연간에 명안공주에게 지급한 물품을 기록한 단자(單子), 명안궁에서 광포도민(廣浦島民)에게 사패지(賜牌地) 사용료를 납부하라는 내용의 패지(牌旨)가 보관되어 있다.
유물로는 숙종이 명안공주에게 하사하였거나 혼례 때 내려준 것으로 보이는 완초화문석(莞草花紋席)·운보문(雲寶文) 겹보자기 등이 있다. 당대의 궁중생활사 및 사회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강릉시립박물관(죽헌동 177-4)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