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성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에 재임하고 있었는데, 조선에 대한 원병의 파견논의를 적극적으로 주창하여 실현시켰다.
그러나 평양과 서울 수복 이후 명군이 울산·남원 전투에서 왜군에 패배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으며, 뒤이어 심유경(沈維敬)의 화의 실패로 인한 모함을 받아 옥사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그를 위하여 변호하는 한편,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명군이 처음 참전한 평양에 비변사의 건의로 무열사를 세웠다. 건립과 동시에 사액을 내렸고, 후일 원병을 이끌어왔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양원(楊元)·이여백(李如栢)·장세작(張世爵) 등이 죽자 이들을 추향(追享)하였다.
병자호란 후 북벌론이 일어나고 존명의리가 강조되는 상황에서 국가로부터 특별한 은전과 지원을 받았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 철폐 때에도 대상에서 제외되어 계속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