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로는 조선국왕이 막부장군(幕府將軍)에게 파견하는 ‘통신사(通信使)’와 예조참의의 명의로 대마도주에게 파견하는 ‘문위행’이 있었다. 통신사가 막부와의 우호관계 수립 및 그 유지를 위한 사절단이라면, 문위행은 통교의 실무자인 대마도주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사절단이었다. 문위행의 시초는 다음과 같다.
1632년(인조10) 5월 일본 천황을 보좌하는 관백 원수충(源秀忠)이 죽고, 원가충(源家忠)이 관백을 습직했다. 이에 에도[江戶]에 갔던 대마도주 소우 요시나리[宗義成]가 대마도에 돌아와 문위사절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8월에 특별히 도해역관(渡海譯官) 당상(堂上) 한상(韓祥)과 당하(堂下) 최의길(崔義吉) 등 56인을 대마부중(對馬府中)에 보내어 위로하였는데, 이것이 문위행의 시작이다.
그 뒤 조선에서는 이것이 전례가 되어, 대마도주가 에도 참부(參府)를 마치고 대마도에 돌아오거나, 도주나 장군의 경조사에 문위하는 등, 긴급한 외교 사무를 처리할 때 예조참의의 명의로 당상역관을 대마도주에게 파견하였다. 이들 문위행의 구성과 파견 절차 및 행로는 통신사 파견에 준하여 행해졌다.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의 문위행 구성은 당상·당하관 이하 총 24종의 직종에 91인의 인원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규정대로 91인을 파견한 문위행은 1704년(숙종 30) 단 1회뿐이고, 적은 경우는 45인에서 많게는 154인에 이른다.
평균 4∼5년에 한 번씩 파견된 문위행은 20∼30년에 한 번 파견된 통신사행에 비해 실질적으로 두 나라의 현안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욱 효과적이었다. 문위행의 대마도 왕복 일정은 평균 92일 간이고, 대마도주가 있었던 부중(府中) 체류일은 평균 80일이었다. 그러나 짧게는 29일(1651년)부터 길게는 247일(1858년) 동안 체류하기도 했다.
부중에 도착한 문위역관은 하선연(下船宴)·서계다례(書契茶禮)·별연(別宴)·이정암다례(以酊庵茶禮)·만송원다례(萬松院茶禮)·상선연(上船宴) 등의 연향에 참석했다. 연향일은 체류 기간 동안의 국기(國忌)와 당상·당하관의 기일(忌日)을 피해서 결정했다. 연향 당일 날씨가 좋지 않을 경우도 연기하였다.
체류기간의 연장은 상대적으로 대마도의 경제적 부담을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 상황이 악화되는 18세기 후반 이후 문위행의 체류기간은 계속 늘어났다. 이러한 문위행은 1811년(순조 11) 통신사가 단절된 이후에도 계속 파견되어 양국의 외교를 지속했다는 데 그 의의가 높다. 1632년부터 1860년까지 모두 54회의 문위행이 파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