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무용은 신직자(神職者)들이 주축이 되어 추는 종교적인 춤과 민간인들이 추는 춤으로 분류할 수 있다.우선 종교적인 춤을 살펴보면 무(巫)굿에서 행하여지는 무당춤과 사찰에서 큰 재(齋)를 지낼 때 승려들이 추는 이른바 작법(作法)춤이 있다.
그리고 민간인의 춤은 민중적인 춤과 예능적인 춤으로 나눌 수 있다.하지만 민중적인 춤과 예능적인 춤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고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엄밀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연희집단의 기원이나 성격 면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민중적 무용이 생활적(생산)이고 축제적이며 비전문적이며 놀이성이 강하여 더불어 노는 것인 데 비하여, 예능적 무용은 직업적이고 상업적이며 또한 전문적이고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무당춤을 분류해 보면 강신무(降神巫)가 추는 신무(神舞)와 세습무(世襲巫)가 추는 축원적(祝願的)인 춤으로 대별할 수 있으며, 작법춤은 바라춤과 법고(法鼓)춤, 그리고 착복(着服)춤에는 타주(打柱)춤과 나비춤이 있다.
민간인의 춤에 있어서 민중적인 춤은 집단무용인 경우 농악을 위시하여 강강술래 · 탈춤과 같은 종교적 바탕의 무용과 지게목발춤 · 못방고춤 · 못북춤과 같은 노동무용도 있으며, 개인무용으로는 이른바 보릿대춤 · 덧뵈기춤 · 절구대춤 · 막대기춤 등으로 불리는 허튼춤과 동물이나 사람의 흉내를 내는 병신춤 등이 있다.
또한, 예능적인 춤은 집단무용으로는 농악과 탈춤이 있고, 개인무용으로는 살풀이춤을 비롯하여 승무(僧舞) · 검무(劍舞) · 태평무(太平舞)와 같은 것이 대표적이며 사랑방춤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기교가 섬세하여 예술성이 한층 높다.
한국무용은 삼국시대 이전의 원시적 생활무용의 춤과 고려 때의 예인집단(藝人集團)이 추는 춤, 그리고 조선시대 중엽 이후 민중문화가 발달한 시대의 오락적 · 예술적 춤 등으로 그 맥락을 찾을 수가 있다.
우리 나라 춤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오경통의 五經通義≫에 “동이지악 지모무 조시생야(東夷之樂持矛舞助時生也)”라고 한 대목이 있다. 이 원시무용은 병기창(兵器槍)을 들고 추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의 신속(神俗)으로 보아 농사와도 관련이 있고 전투무용적 성격(戰鬪舞踊的性格)의 무속의식무용(巫俗儀式舞踊)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또한, ≪주관춘관주소 周官春官註疏≫에 “동이(東夷)의 악(樂)인 주리(侏○)는 양기(陽氣)를 발생하여 만물을 소생시킨다.”라고 하여 지모무(持矛舞)가 고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춤이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원시시대는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소위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사회였으므로 공동제가 정월과 5월 파종기, 그리고 10월 수확기에 열렸는데, ≪삼국지≫의 부여의 영고제(迎鼓祭), 마한의 천군제(天君祭:蘇塗)에서 지금의 무속무용을 추정할 수 있다.
집단무용의 형태는 ≪삼국지≫ 마한전에 탁무(鐸舞)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탁무는 지금의 농악과 유사한 내용과 형식임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춤은 외래무용(外來舞踊)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특수예인집단들에 의하여 새로운 종교의식무용과 오락적인 춤, 그리고 예술적인 춤들이 창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엽 이후부터는 민중문화가 발달함으로써 춤은 한층 더 인간적인 내용을 갖춘 표현적인 춤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이러한 춤들이 정월 설날과 보름, 그리고 단오 · 추석과 같은 명절에 축제를 벌임으로써 계승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국가유산의 가치가 있는 무당춤과 탈춤, 그리고 농악과 승무 등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으며, 또한 무대무용으로서의 예술적 무용으로도 발달하게 된 것이다.
무속무용은 12거리의 드라마틱한 진행절차에서 추어지는데, 강신무가 추는 춤은 신무인 데 비하여 세습무가 추는 춤은 축원적인 춤이라 할 수 있고, 그 기능은 청신(請神) · 오신(娛神) · 송신(送神) · 축귀(逐鬼) 등과 같은 제의적 기능(祭儀的機能)과 연희(演戱) · 오락 · 예술 · 점술 · 의료 등과 같은 주술적 기능(呪術的機能)을 가지고 있다.
불교의식무용인 경우 그 춤은 각종의 재식(齋式)에서 작법(作法:의식절차) 절차에 따라 춤을 추게 되는데, 부처님께 공양드리는 것과 중생들을 천도하는 제의적 기능과 선적 예능(禪的藝能)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민중적인 춤은 그 내용이 벽사진경(?邪進慶)의 안택(安宅)굿적, 종교적 바탕을 가지고 있으며, 제화초복(除禍招福)을 위한 농경적 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민중적 무용은 기층문화권을 이루고 있는 민중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잉태된 것이므로 개인적 미의식에서 창출된 것이 아니라 집단의식에서 나온 예능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민중적인 무용은 이른바 서민 계층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고상하고 우아한 예능은 아니지만, 흙냄새가 물씬 나고 소박하여 천재(天災)와의 싸움에 뛰어드는 농민들의 에너지가 넘쳐 흐르고 씩씩하며 패기로 충만되어 있다. 일을 줄기차게 하는 생산자에게는 힘이 제일 고귀한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생명력을 불러일으키고 고되고 반복되는 노동에 흥을 넣어 피로를 회복시킴으로써 일의 의욕을 북돋워주는 것이 민중적인 춤이다. 따라서, 이러한 춤에는 일하는 사람들끼리 대동(大同)으로 뭉치려는 뜻이 깔려 있는 것이다.
또한 춤추는 농민들은 고된 노동을 하며 살아야 하므로 현실에 대한 갈등이 있는가 하면 아울러 신분적인 갈등도 가졌기 때문에, 이를 해소시키고 공동체의 확인을 위해서도 대동춤은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민중적인 대동춤은 원초적으로 종교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민속놀이가 습합되어 있는 종합예능적 성격을 가졌으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특히 종교적인 예능형태, 즉 신을 위한 신예능(神藝能)은 퇴화하고 인간을 위하여 행한 오락적이고 예술적인 형태만이 한층 강하게 모양지어졌다.
이것이 광대들에 의하여 이어진, 예능적인 민속무용이다. 예능적인 민속무용은 근본이 민중적인 춤과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질이 다를 뿐이다. 다시 말해서, 민중적인 춤을 한층 기능적으로 미화한 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천민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갈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춤 속에는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있는, 이른바 한(恨)적인 예능일 수가 있었고 또 풍자적인 춤이 창출된 것이다.
우리 나라 민속무용을 보면 대체적으로 기본동작이 맺고 어르다 푸는 정중동(靜中動)의 3요소로 되어 있으며, 춤사위의 배열이 획일화된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즉흥적으로 변화시킨 것에서 온 다양성과 변화에 특징이 있다.
민속무용의 춤사위를 분석하면 주로 그 동작형이 회전형(回轉型)을 비롯하여 굴신(屈伸)과 답무형(踏舞型), 휘젓기와 뿌림형, 도무(跳舞)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춤사위를 연희하는 과정에서 아름답게 나타난 모양을 보면, 동작을 맺음으로써 생긴 정(靜)과 어를 때 생긴 작은 선(線), 풀었을 때 생긴 큰 선 등 점(點)과 선의 조화미가 나타나고, 팔과 발의 움직임을 단순화하거나 움직임의 속도에 따라 생긴 동작의 여일미(餘日美), 움직임이 규격화되어 있거나 기계적 형이 아니라 좀더 자유롭고 단순하다 할 수 있는 이른바 투박스러운 단순미, 목이나 발 그리고 팔의 움직임으로 생긴 무수한 곡선, 특히 원(圓)과 태극(太極) · 나선형(螺旋形)과 같은 곡선, 즉 한쪽으로만 돌아가지 않고 반대쪽으로도 돌아가는 이른바 S자형의 곡선미 등 신비롭고 개성적인 미적 동작이 노출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춤은 그 표정이 어떻게 보면 은은한 속에 솟구치는 힘이 보이고, 어떤 때는 가냘픈 맛이 나거나 의젓하고 당당하며 잔잔하다가도 날카로움을 느끼게 한다.
또한, 어떻게 보면 슬픔이 보이고 즐거움과 건강이 있으며, 구수하고 아기자기하며 시원스럽기도 한 미적 관점이 우아한 것뿐만 아니라, 추한 것, 코믹한 것 등 그 표정이 해학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미적 동작들은 지나치게 작위하지 않는 것에서 창출되었으므로 근원적으로도 자연성의 미에 포함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속무용이 가진 미의 근원이 이와 같이 해학미와 자연성의 미를 가지게 된 것은 우리 민족이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현세관 때문에 생긴 낙천적 기질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속무용의 복식은 대체적으로 종교적인 민속무용에서는 신복(神服)이거나 주술성을 띠고 있으며, 연예적인 민속무용에서는 장식성을 가지고 있거나 미적 무복(舞服)의 기능을 가지게 된다.
지방의 무무(巫舞)인 경우 큰 머리에 큰 옷으로 정장한 것과 치마저고리에 평복차림으로 구분되는데, 큰머리는 불보살이 쓰는 화관으로 바리공주가 썼다는 유래가 있다. 그리고 머리 뒤의 댕기는 망령이 앉을 수 있는 자리(집)라 하며, 댕기에 드린 영전은 망령을 씻길 때 쓰이고, 옷 뒤에 새겨진 학은 을화대신을 상징한 것이다.
옷차림은 대체로 홍치마 · 쾌자 · 띠 · 한삼 · 큰머리 비네(비녀) · 댕기 · 원정 등으로 되어 있다. 동해안지방의 무무는 흰 치마저고리에 쾌자를 걸치고 허리에는 초록띠를 동여매고 머리에는 달비(빨간 댕기), 이마에는 흰 천을 동여맨다. 또한, 화옷에 고깔을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밖에도 진도(珍島)와 서울 · 평안도 · 함경도 · 황해도 · 제주도 · 경기도 지방도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닌 무복이 있다. 법고춤은 장삼에 홍가사(紅袈裟)를 착용하고 북채를 가지고 추며, 나비춤인 경우 백의(白衣)를 입고 머리에는 대형고깔을 쓰고 손에는 연꽃을 든다.
농악의 무복은 흰옷에 고깔을 쓰는 경우와 전립을 쓰는 경우가 있으며 띠는 보통 청 · 황 · 적색을 두르게 된다. 그런데 전립에는 부포를 달아매거나 상모 또는 12발상모와 같은 것을 달아맨다.
그리고 무동(舞童)인 경우 노랑저고리에 빨강치마를 걸치고 그 위에 쾌자를 입으며 머리에는 수건을 쓰는 경우와 고깔을 쓰는 경우가 있다. 또한, 지역에 따라서는 남복(男服)에 쾌자를 입고 갓을 쓰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포수 · 각시 · 양반 등의 잡색(雜色)들은 배역에 맞는 옷을 입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사람가면을 쓰기도 하고 전라도 여천 지방이나 경기도 지방의 농악에서는 동물가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탈춤의 경우, 배역에 따라 다양한 무복을 가지고 있으나 그 특색은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예로서, 서울과 북한지방의 탈춤 복식은 대체적으로 화려하고 남부지방의 탈춤 복식은 투박스럽고 자극이 없는 흰색에 가까운 옷이다. 그러나 모든 무복의 공통점은 한삼이나 장삼을 입고 추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누어지며, 또한 광대가 추는 탈춤이 아닌 민중적 성격을 띤 탈춤은 흰옷을 착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살풀이춤의 무복은 고운 머리에 비녀를 꽂고 백색 저고리와 치마에 버선 그리고 옷고름이 늘어진 복장을 하고 수건을 걸치고 추며, 승무인 경우 흑색 장삼과 백색의 바지저고리, 행전, 백색 고깔과 버선, 그리고 홍가사 등 3색의 조화로 되어 있는 것과 백색 장삼에 백색 바지저고리, 행전, 백색 고깔, 버선 그리고 홍가사 등 이원색의 물량적 대립을 시킨 것 등 두 가지의 유형이 있다.
그런데 무속무용이나 작법춤에서는 이러한 무복들이 종교적인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복(巫服)인 경우 그 옷은 신이 빨리 내리게 하고 주력(呪力)이 있으므로 일종의 신의 성격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작법춤에서 나비춤과 같은 복식은 연꽃을 가지고 있으므로 불화(佛畵)를 상징할 수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법복(法服)의 기능을 가진다. 그리고 농악인 경우 그 기본은 농사복이며 동시에 전복(戰服)과 불교의 법복이 혼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살풀이춤이나 승무인 경우 창우(倡優)나 기방인(妓房人)들의 미적 감각에서 창출한 가장 예술적인 무복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무복의 아름다움은 살풀이춤인 경우 ‘짓’은 목의 선을 살리고 저고리의 ‘부리’는 은은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것이며, 치마는 속치마가 보일 듯 말듯 하는 데서 여색(女色)의 매력을 주고 있으며, 버선의 곡선미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승무무복의 아름다움은 고깔과 장삼소매, 그리고 홍가사의 삼원적 조화미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