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사고는 크고 작은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크게는 동시대의 민족공동체 구성원에게 보편화되어 있을 전통적 사고방식이고 작게는 ‘민간신념(folk idea)’이거니와 여기에서는 후자만이 다루어진다.
민간신념은 가치관·윤리·교훈·생활지침 등을 망라하는 민중의 범상한 ‘생의 철학’이다. 그것은 속담과 속신(俗信) 및 욕과 더러는 겹치고 더러는 이웃하면서 ‘민중의 금언’ 또는 ‘민중의 잠언’, ‘민중의 경구’를 겸한 ‘민중의 지혜’ 구실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큰 범주에 둘 민간사고의 기층(基層)에 깔리거나 아니면 그 민간사고의 중추적인 단순명제를 형성할 수도 있다.
민간사고 전체가 옷감이라면 민속신념은 그 씨줄이며 날줄 구실을 다하는 것이다. 민간신념은 속담과 비슷하게 대체로 단일문장의 진술형식을 갖추고 있거니와 그 점에서는 속신과 다를 바 없다.
간략하게 ‘갑은 을이다’, ‘갑이 을한다 또는 ’갑을 을하다‘라는 형식의 단순성이 두드러지면서 속담에서 활용될 정도의 비유법·대조법 등의 수사법에도 덜 의존하고 있다.
진술형식이 매우 간단명료한 것은 단도직입이고도 즉각적인 음 전달의 효과를 앞세워서 민간신념의 주제의 강직성과 기억의 편의성, 그리고 활용의 기민성들을 보장하는 데 이바지한다.
따라서, 민간신념은 일상생활의 대화, 각급학교의 교육현장, 대중연설, 신문의 사설이나 칼럼 등은 물론 문학작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또 자주자주 활용되는 것이다.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아주 좋은 본보기이지만, 이것이 윤동주(尹東柱)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던 마음뿐만이 아니라 ‘백성은 큰 하늘’이라던 천도교의 종지(宗旨:주장되는 요지)에 관련될 수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하늘이 무섭지 않나?’, ‘하늘 무서운 줄 알아라.’, ‘하늘을 받든다.’ 등은 물론 ‘천벌은 받는다.’와 더불어서 하나의 계열체를 이루고 그 각각은 상호간의 변이(變異)형은 이루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민속신념의 형식이 탄력성을 갖추고 있음에 대해서 시사하는 것이지만, 달리는 화자(話者), 곧 사용하는 자의 임의로운 그리고 주어진 상황이며 맥락에 맞는 선택이 가능함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것이다.
민간신념은 독백이며 대화 두 가지 맥락에 걸쳐 두루 쓰인다. 독백에서 민간사고는 한탄 이외에 감회의 토로이며 자기신념의 재확인, 세속적인 진실의 재인식 등에 쓰인다. ‘인생만사 요지경이라더니, 내 그럴 줄 알았지.’, ‘눈감으면 그만인데, 내가 왜 이럴고!’ 등은 이 보기에 속한다.
대화에서 민간신념이 쓰일 때, 화제가 된 사건이며 주제의 요약을 민간사고가 도맡게 되는 이외에 화자(話者)가 그 사건이며 주제를 대하는 정신적인 또는 감정적인 태도를 청자(廳者)에게 전달하게 된다. 그러면서 청자의 각성이나 결단을 촉구하는 강한 모호성을 발휘하게 된다.
‘진인사 대천명이라지 않나! 기다리게.’, ‘사람 인연은 썩 줄이라고 했듯이 그 두 사람이 그래 헤어졌다지 뭐야.’ 등과 같이 이 같은 실제 생활환경에서 경험되는 민간신념의 쓰임새는 속담이며 속신 그리고 욕들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이들 단문(單文)의 언어전승(傳承)이 ‘민중의 지혜’로서 공통의 기능을 갖는 같은 범주에 소속되고 있음에 대해 시사하고 있다.
널리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민간신념은 한 공동체의 전통적인 가치관, 규범, 그리고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의 소산이다. 따라서 민간사고는 단문으로 요약된 전통적인 가치의 체계이며 이념의 체계의 일환이라는 속성을 갖추고 있다.
그러면서 민간신념은 민중들의 생활의 지침, 생의 이념으로서 구실하는 강한 실천성(實踐性)이나 행동성을 갖추고 있거니와 일상생활의 현장이며 대화에서 많이 사용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자주 쓰이는 관용구이긴 해도 쓰일 때마다 그 당장 당장에 어울리는 즉흥적 효험을 발휘하는 뜻에서 민간신념은 ‘오래 묵은 새 말’이다.
민간신념의 쓰임새는 매우 광범위하고 또 다양해서 일상생활·인간관계·인생관·세계관 등에 두루 걸쳐 있다. “이웃사촌”, “찬물일수록 쉬어가며 마셔라.”, “첫 술에 배 부를까?”, “식자우환(識字憂患)” 등은 자질구레한 일상생활의 교훈으로서 또는 지침으로서 작용할 만한 것들이다.
그런가 하면, “본서방이 원수다.”, “그래도 본 마누라!”, “부부는 원수끼리 만난다.”, “부부 싸움, 칼로 물베기”, “부부는 돌아 누우면 남남”, “여자는 여우다.”, “사내는 늑대다.” 등은 인간관계에 관한 지식이며 식견들이다. 달리는 인생관이며 세계관의 표백인 민간신념도 있으니, 양적으로는 이에 들 것이 가장 많은 편이다.
“무자식이 상팔자”, “진인사 대천명”, “인연은 썩줄”, “인생은 요지경”, “인생은 나그네길”, “부귀영화는 하늘이 낸다.”, “쌍놈에 씨가 있나?”, “대문밖이 황천이다.”, “눈감으면 그만이다”, “사람팔자 시간문제”, “유전 무죄, 무전 유죄”, “빽!하고 죽는다.”, “죽지 못해 산다.”, “옷깃만 스쳐도 삼세의 인연”, “화부단행(禍不單行)”, “죽으면 썩을 살 아끼지 말라.” 이다.
이들 몇 가지로 가름될 보기들은 민간신념이 인생이며 세상의 구석구석을 망라하고 있음을 쉽게 보여주고 있거니와 이들을 통해서 민중들은 때로는 체념이나 달관으로 ○로는 새 결의며 각오 또는 각성으로 각기 살아가는 자세를 추스리고 가다듬을 수 있는 것이다.
의롭고 바르게 그리고 인간답게 사는 길에 대한 자문자답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민간신념을 궁극적으로 ‘민중의 도덕’ 내지 ‘민중의 윤리’라고 마무리짓게 된다.
민간신념은 개별적으로 쓰일 때, 산만해 보이고 단속(斷續)적인 듯이 보이지만 민간신념은 그 자체로 일정한 연관을 형성하면서 끼리끼리 맞물리고 또 엮어져 있다. 그것들은 때로는 수직적인 계층의 연관인가 하면 때로는 수평의 횡적인 연관이기도 하다.
“사람이 그럴 수가?(없다)”는 거의 언제나 “개같은 짐승이라면 몰라도”와 짝지워지거니와 이 경우 두 신념은 서로 대구(對句)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여질 만큼 밀착되어 있다. 이 관계를 순접(順接)이라고 부른다면 그와 역의 관계도 지적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이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할 때의 사람과 “사람이 그럴 수가”라고 할 경우의 사람은 정반대가 된 만큼 다르다.
전자에서 사람이 무능할 수도 실책을 저지를 수도 있음을 함축하고 있는 이외에 허무할 수도 있음을 역시 함축하고 있음에 비해서, 후자에서 사람은 강하게 긍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두 신념은 서로 역접(逆接)되어 있다고 규정지어질 만한 것이다.
한편 “사람 새끼가 어떻게 그럴 수가?”라는 신념은 “하늘이 부끄럽지 않냐?”와 상하 수직의 관계로 연관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이는 단지 하늘과 사람(땅)의 공간적 위상에만 기대어서 판단되는 것은 아니다. 하늘이 상위의 지배적인 관념인데 반해서 사람은 하위의 순종적인 관념이라는 사실에 의지해서도 그같이 판단되는 것이다.
달리는 “하늘이 무심치 않다.”와 “벼락을 피하는가 봐라.”가 서로 횡적으로 소집되어 있음에 비해서 “하늘이 무심치 않다.”와 “사람이 죄짓곤 못 산다.”는 수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벼락을 피하는 가 봐라.”가 “사람이 죄짓곤 못산다.”가 거의 등가(等價)의 횡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니면 수직의 계층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어느 한쪽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늘이 무심치 않아서 사람이 벼락을 못 피하듯 죄짓고도 못산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민속신념이 삼차원의 방위로 서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실제 생활이며 언어생활을 그물처럼 감싸고 있는 것이 큰 민속신념임에 대해 시사할 것이다.
그러면서 신념은 비유의 정도가 희박하고 우원법(迂遠法)이나 상징이 억제되어 있는 만큼, 직설적인 효과 곧 정상의 일침으로, 정곡을 뚫는 화살로 일상생활과 언어생활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한국인은 정의심·윤리감 등을 하늘에 기탁하면서 그들의 휴머니즘을 형성해왔음을 민간신념은 알알이 보여 주고 있다.
“하늘에 묻어라.”, “(그러고도) 어찌 하늘을 바라보랴.”, “하늘을 등진 죄인”, “하늘 가리고 산다.”―이 숫한 관용구가 자주 쓰이고 여러 경우에 쓰이는 것만 보아도 하늘이 윤리의 거울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 하늘의 민속신념에는 한국의 신화와 상고대의 무속신앙의 우주관이 투사되어 있는 이외에 중국 유학의 천도(天道) 사상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중국 유학의 천도사상에서 일련의 하늘에 관한 민간신념이 발상하였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단군신화(檀君神話)와 혁거세신화(赫居世神話) 그리고 동명왕신화(東明王神話)가 이미 인간세계 개벽의 동기를 하늘에서 구하고 있기 때문이고 왕권(王權)을 천권(天權)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이 민속신념은 시대적인 적층성(積層性)과 문화권의 중첩성을 포섭하면서 형성되어왔다. 따라서 그 표현형식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해석이며 의미의 다양성을 내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민중의 사상체계에 깊이 침윤한 전통과 수용(受容)문화의 부피며 무게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이다.
가령, “진인사 대천명”, “천생연분”, “적선지가 팔유여경” 등을 한자문화에서 수용하였는가 하면, “옷깃이 스쳐도 삼세의 인연”, “인과업보” 등은 불교에서 수용한 것이거니와 이것들은 동시에 상층의 문화가 기층의 문화에로 침강(沈降:가라앉음)한 것이라는 속성을 나누어 갖고 있다.
달리는 또 “유전 무죄, 무전 유죄”, “공부해서 남 주나?”, “빽! 하고 죽는다”, “정보에 밝아야 살아남는다.” 등은 오늘날의 세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들이다.
민간신념은 전통 바깥에서 새로운 것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전통보다 앞선 새로운 것을 수용하면서 그 다양성과 적층성을 늘려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민간신념의 적응기제(메카니즘)로 간주될 만한 것이다.
한편, 위에서 보인 돈에 관한 민간신념을 따로 고찰할 때, 민간신념의 또 다른 속성을 잡아낼 수 있게 된다. “돈줄은 명줄이다.”, “돈이 효자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폐의 영감이 제일 잘 났다.”, “돈 나고 사람 났나?”, “돌고 도는 게 돈이다.”
이것들은 전통적으로 통용된 민간신념이거니와 극히 최근의 세태로 말미암아서, 이에 “유전 무죄, 무전 유죄”가 새로이 덧붙여 진 것이다.
이 경우, 이 모든 민간신념들은 주제를 함께 나누어 갖고 있는, 동일한 것의 변이라고 보여지거니와 이는 민간신념이 전통을 바탕에 깔고서 실현하는 초시대적인 자기조절의 기능 내지 적응의 생명력이다.
민간신념은 이 같은 생명력으로 변함없이 주어진 시대의 공감을 형성하고 공통의 세계관·인생관 등을 엮어내는 데 이바지 할 수 있었다. 아울러 때에 따라서는 커다란 사회적 움직임이나 역사의 흐름을 위한 지표 노릇을 다하기도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동학혁명에서 하늘이 다한 몫이 이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