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이지(履之).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민형수(閔亨洙)이며, 어머니는 이세항(李世恒)의 딸이다.
173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740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을 거쳐 1741년 교리가 되어 서원과 사우(祠宇)의 남설(濫設)을 금지하자는 대신들의 주장을 반박한 바 있고, 경종 때의 신임사화에서 화를 입은 아버지의 신원을 간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45년 동지사 조관빈(趙觀彬)의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백두산 동쪽 오랑캐 등등기(鄧鄧磯)의 침입을 경계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정언·사서(司書)·수찬 등을 역임하고 1748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며, 3년 뒤 대사성으로 돌아와 곧 대사간이 되었다. 이때 다시 아버지를 포함한 신임사화에서 화를 입은 인물의 신원을 주장하고, 가해자인 소론일파의 처벌을 극론하다가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그 뒤 곧 소환되어 부제학과 대사헌을 역임하고, 1757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중국과의 밀무역에 따른 제반 폐단의 개혁을 건의하였다. 이어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병을 칭하고 체직(遞職)을 청하여 호조판서가 되었다. 1760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다음 해에 죽었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서도(西都) 밀행에 책임지고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좌의정 이후(李후) 등과 함께 자살하였다고 한다. 평소 홍봉한(洪鳳漢)·김상복(金相福) 등과 서로 우의가 깊었는데, 이들이 차례로 정승이 되자 세상에서 삼태지우(三台之友)라고 불렀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