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보의』는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국토방위 책략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서술한 군서이다. 정약용이 전라남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1812년에 썼다. 내용은 왜침에 대비하여 항전할 수 있도록 요충지마다 산성을 쌓자는 것이다. 병란이 일어나면 식량을 가지고 그 산성에 집결하여 저항전을 전개하는 것이다. 정약용은 농민들이 자위적 항전의 거점으로 이용될 산성을 ‘민보’라고 불렀다. 이 책은 조선의 지리적 형편과 임진왜란의 경험에 비추어 독자적으로 재구성되었다. 『민보의』는 민보라는 농민 자위조직에 의한 국방 체제를 주장한 최초의 논문이다.
1권. 그가 전라남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 중이던 1812년(순조 12)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약용 당대 조선의 농촌 사회는 군사적으로 무방비 상태 하에 있었다. 임진왜란 후부터 지방의 말단 행정구역마다 양반 및 양인(良人)들로 충원되는 이른바 속오군(束伍軍)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방군으로서의 속오군은 처음부터 사회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헐벗고 실의에 찬 빈농들의 오합지중으로 출발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란 후 농촌 사회 전체의 심각한 빈궁, 그리고 군사 행정에 나타난 세리들의 부정부패와 가렴주구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병자호란이래 230여년간 단 한번의 전쟁도 없는 시대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속오군은 이미 1800년대 훨씬 이전부터 실재하는 병력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과세장부상의 허구적 숫자로서만이 존속할 뿐이었다. 관리들과 지주들은 일반농민들을 경제적으로 착취하였으나 그들을 군사적으로 보호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여러 세대에 걸쳐 자행된 관리들의 농민 수탈과 협잡은 매우 불행한 사회 심리적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백성들은 관(官)에 대한 전면적인 반감과 불신의식을 가지게 된 반면, 병란(兵亂)에 대해서는 극도로 두려워하고 패배주의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실제로 1811년 평안도의 홍경래의 난(洪景來의 亂)의 소문과 조만간 왜구의 침입이 있으리라는 유언비어가 1812년 남해안 지방에 퍼졌을 때 수많은 지역 주민들이 도망가 흩어져 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이러한 사태를 직접 목격하고서 『민보의』를 저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하면 농민들이 병란, 특히 왜침을 당하더라도 뿔뿔이 도망하지 않고 스스로 단결해 자신들을 보위하고 적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민보의』 속에서 정약용이 답하고자 한 중심 논제였다.
그는 이 책자에서 요충지마다 산성들을 쌓고 그곳을 전시 대피소 및 유격전의 거점으로 이용하는 산성 중심의 농민자위체제(農民自衛體制)를 구상, 제안하였다. 즉, 병란이 일어나면 요충지 주변의 모든 주민들은 식량과 가산 일체를 가지고 요충지의 산성으로 집결, 식량 조달이 불가능한 적에 대해 장기 저항전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위 체제는 원칙적으로 관권의 개입 없이 단지 일반 백성들의 자율적 통제하에 운영되는 것이었다. 전시에 농민들의 자위 및 항전의 거점으로 이용될 이러한 산성을 그는 ‘민보(民堡)’라고 불렀다.
민보에 의한 농민자위체제는 이미 명나라의 변경 지방에서 시행된 적이 있었다. 민보의 설치와 운영 방식에 관한 책자가 명나라 말의 군사 자료총서인 『무비지(武備志)』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정약용은 『민보의』를 쓰면서 이것을 주요 자료로 참고하였다.
그러나 『민보의』 내용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실제적인 사항들, 예컨대 요충지 선정시 고려 사항, 민보의 축성 방식, 민보 방위체제하에서의 민병의 조직과 생활 규율, 민보수비를 위한 무기와 장비들에 대해서는 조선의 지리적 형편과 임진왜란의 경험에 비추어 독자적으로 재구성하였다.
『민보의』는 민보라는 농민 자위조직에 의한 국방 체제를 주장한 최초의 논문이었다. 이 논문에서 정약용이 가상한 침략군은 일본이었다. 관료조직 전체가 고질적인 재정 궁핍과 행정적 부패 속에서 허덕이고 있고, 백성들 또한 관을 불신, 기피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였던 당시의 여건으로 보아, 정약용의 민보방위론은 실천가능하고 적절한 구상이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서양 선박들의 빈번한 출현, 서학(西學 : 天主敎)의 유포, 북경(北京)의 함락, 그리고 내침한 서양선박들과의 교전사건으로 인해 전국의 민심이 동요하자 연해변의 많은 식자들은 『민보의』를 모범으로 한 비변책의 강구를 조심스럽게 주장하였다.
병인양요 사건 이듬해인 1867년 훈련대장 신헌(申櫶)의 건의로 조정에서도 뒤늦게나마 민보방위체제의 시행을 결정하였으나, 결국은 지상계획(紙上計劃)으로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