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헌 ()

신헌
신헌
근대사
인물
조선후기 금위대장, 훈련대장, 진무사 등을 역임한 무신. 외교가.
이칭
국빈(國賓)
위당(威堂), 우석(于石)
이칭
금당(琴堂), 동양(東陽), 신관호(申觀浩)
시호
장숙(壯肅)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10년(순조 10)
사망 연도
1884년(고종 21)
본관
평산(平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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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신헌은 조선후기 금위대장, 훈련대장, 진무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1810년(순조 10)에 태어나 1884년(고종 21)에 사망했다. 전형적인 무관 가문 출신이지만 정약용과 김정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강위·박규수 등 개화파 인물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형조·병조·공조판서를 역임하였고,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摠戎使)로 강화의 염창(鹽倉)을 수비하였다. 1876년 전권대관에 임명되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고, 1882년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는 등 조선의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정의
조선후기 금위대장, 훈련대장, 진무사 등을 역임한 무신. 외교가.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신관호(申觀浩). 자는 국빈(國賓), 호는 위당(威堂) · 금당(琴堂) · 동양(東陽) · 우석(于石). 할아버지는 훈련대장 신홍주(申鴻周)이며, 아버지는 부사 신의직(申義直)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전형적인 무관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당대의 석학이며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 · 김정희(金正喜) 문하에서 다양한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리하여 무관이면서도 독특한 학문적 소양을 쌓아 유장(儒將)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또 개화파 인물들인 강위(姜瑋) · 박규수(朴珪壽) 등과 폭넓게 교유하여 현실에 밝은 식견을 가질 수가 있었다.

정약용의 민간자위전법인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 발전시켜 『민보집설(民堡輯說)』 · 『융서촬요(戎書撮要)』 등과 같은 병서를 저술, 자신의 국방론을 집대성시켰다. 김정희로부터 금석학(金石學) · 시도(詩道) · 서예 등을 배워 현재에는 전하지는 않지만 『금석원류휘집(金石源流彙集)』이라는 금석학 관계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예서(隷書)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지리학에도 관심이 높아 김정호(金正浩)『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제작에 조력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유산필기(酉山筆記)』라는 역사지리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1843년(헌종 9) 전라도우수사로 재임하던 시절에 해남 대둔사(大芚寺)초의선사(草衣禪師)와 교유하면서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을 두었다. 이 밖에 농법에도 관심을 가져 『농축회통(農蓄會通)』이라는 농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1827년(순조 27) 할아버지 신홍주의 후광을 업고 별군직(別軍職)에 차출되고, 이듬해 무과에 급제,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순조 · 헌종 · 철종 · 고종조에 걸쳐 중요 무반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헌종 때에는 왕의 신임을 받아 중화부사 · 전라우도수군절도사 · 봉산군수 ·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849년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헌종이 급서하고 철종이 등극하자 안동김씨 일파에게 배척받아 한동안 정계에서 유리되었다.

헌종이 위독할 때 사사로이 의원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했다는 죄목으로 1849년에 전라도 녹도(鹿島)에 유배되었다. 1853년 감형되어 무주로 이배되었다가 철종의 배려로 1857년에 풀려났다.

철종대에는 1861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이어 형조판서 · 한성부판윤 · 공조판서 · 우포도대장 등을 두루 지냈다. 고종 초기에도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형조 · 병조 ·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摠戎使)로 강화의 염창(鹽倉)을 수비하였다. 난이 끝난 다음 좌참찬 겸 훈련대장에 임명되고 수뢰포(水雷砲)를 제작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그 뒤 어영대장 · 지행삼군부사(知行三軍府事) · 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874년 진무사(鎭撫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 연해의 요해지인 광성(廣城) · 덕진(德津) · 초지(草芝) 3진(鎭)에 포대를 구축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운양호(雲揚號) 사건 이듬해인 1876년에는 판중추부사로 병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강화도에서 일본의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구로다[黑田淸隆]와 협상을 벌여 강화도조약을 체결, 조선의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때의 협상 전말을 『심행일기(沁行日記)』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1878년에는 병으로 총융사를 사직하고 한동안 노량진에 있는 은휴정(恩休亭)에서 요양하기도 하였다. 1882년에는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로 역시 전권대관이 되어 미국의 슈펠트(Shufeldt, R. W.)와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장숙(壯肅)이다.

참고문헌

『헌종실록(憲宗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일성록(日省錄)』
『매천야록(梅泉野錄)』
「신헌의 국방론」(박찬식,『역사학보』117, 1988)
「19세기 중엽 조선정부의 개항인식과 강화도조약체결」(강미영, 인하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8)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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