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은 1인이다.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가 당연직으로 겸임하였다. 강화도는 고려시대 이래 방어의 요충지로 중시되었으나, 조선 초기의 진관체제하에서는 병마동첨절제영(兵馬同僉節制營)의 하나로 편성되어 강화부사가 동첨절제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그 중요성이 증대되어 1618년(광해군 10)에 부사가 부윤(府尹)으로, 1627년(인조 5)에 유수로 승격된 뒤, 1678년(숙종 4) 중앙 직할군영인 진무영으로 편제되고, 유수가 진무사를 겸임하였다.
진무사 예하에는 중군(中軍, 3품) 1인, 진영장(鎭營將, 정3품, 강화 인근고을의 수령들이 겸직) 5인, 종사관(從事官, 종4품, 강화부경력이 겸임) 1인, 천총(千摠) 4인, 파총(把摠) 10인, 초관(哨官) 63인, 교련관 10인, 기패관(旗牌官) 71인, 군관 15인이 소속되어 있었다.
강화도의 진무영은 약 2만석의 군량미를 포함하여 4만석의 비축미를 운영하고 있었다. 1779년(정조 3)경기·충청·황해 삼도수군통어영이 진무영에 합설되어 진무사가 통어사를 겸임하였으나, 1789년 분리되어 통어영은 경기수영으로 옮겨갔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으로 진무사를 폐지하고 남양에 해방총제영(海防摠制營)을 신설, 강화유수가 해방총관(海防摠管)을 겸하게 하였으나 이듬해에 다시 진무영을 부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