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이길(頤吉). 호는 풍돈(楓墩) 또는 도촌(陶村). 민원(閔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민기문(閔起文)이고, 아버지는 생원 민용(閔溶)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종실 이미수(李眉壽)의 딸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다. 그때 같은 처지의 상촌(象村) 신흠(申欽)과 함께 청강 이제신(李濟臣)에게 수학하다가 두 사람 모두 그의 사위가 되었다.
1589년(선조 22)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594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가 되고, 이어서 검열·설서·대교·봉교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형조좌랑이 되고 평안도병마평사·어천역승(魚川驛丞) 등을 거쳐 1600년 홍문록에 오르고, 이듬해 공조정랑·정언·헌납·수찬·교리를 거쳐 1602년 지평이 되었다.
이때 정인홍(鄭仁弘)의 사주를 받은 문경호(文景虎)가 성혼(成渾)의 관작추탈을 상소하자 대사헌 황신(黃愼)과 함께 무고임을 주장하다가 전주판관으로 좌천되고 이어서 파직, 6년 동안 봉산에 유배되었다. 1609년(광해군 1) 개성부경력에 다시 기용되고 필선·장령을 거쳐, 1613년 교리가 되어 인목대비의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였다.
그 뒤 직강·사예·사성 등을 역임하였으며, 1624년(인조 2)이괄(李适)의 난 때 행재소(行在所)에 호종하지 않아 삭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내자시·내섬사사복시·예빈시정을 거쳐, 판교·첨지중추부사·돈녕부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사촌형인 호조 정랑 민유부(閔有孚)가 일찍 죽자 그의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가 기르고 교육시켰다. 그 가운데 민성휘(閔聖徽)는 나중에 형조 판서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