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시 ()

대동여지도 중 경상남도 창녕, 밀양 부분
대동여지도 중 경상남도 창녕, 밀양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경상남도 북부에 위치한 시.
정의
경상남도 북부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울산광역시·양산시, 서쪽은 창녕군, 남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김해시·창원시, 북쪽은 경상북도 청도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8°34′∼129°01′, 북위 35°21′∼35°38′에 위치한다. 면적은 798.6㎢이고, 인구는 10만 789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읍, 9개 면, 5개 행정동(8개 법정동), 265개 행정리(19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에 있다.

자연환경

경상남도 낙동강 동쪽 내륙에 자리 잡은 오랜 도시로서 지세로 보아 동북쪽에 심산준령이 위치해 있고 서남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밀양의 진산인 화악산이 북쪽에 옹립하여 있고, 동쪽에는 재약산(載藥山, 1,108m)을 중심으로 주산인 가지산(加智山, 1,240m), 영취산(靈鷲山, 737m), 신불산, 문복산이 산맥으로 이어져 있다. 가지산은 서쪽으로 운문산(雲門山, 1,188m), 억산, 구만산(九萬山, 785m), 육화산으로 이어지는 맥을 가진다. 서남으로는 열왕산, 도리산, 종남산(終南山, 664m), 덕대산으로 연결되어 낙동강으로 이어진다. 이외에도 능동산(陵洞山, 982m), 천황산(天皇山, 1,189m), 향봉산(香峰山, 992m), 천왕산(天王山, 619m), 종암산(宗巖山, 546m)·덕암산(德巖山, 544m), 만어산(萬魚山, 670m), 정각산(正覺山, 859m), 화락산(花落山, 625m), 화산(推火山, 243m), 악산(華嶽山, 932m) 등이 있다. 이들 높은 산지에서 발원하는 하천들이 모두 낙동강의 지류를 이루고 있다.

하천이 모두 동북쪽에서 서남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한다. 언양 석남산에서 발원한 동천수가 추화산 동쪽에서 이르러 청도 쪽에서 내려오는 북천수와 합쳐진 밀양강(密陽江)은 사행을 하면서 읍기를 돌아 남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하는 것인데 유로의 연장은 약 96km이며, 여러 지류를 합한 유역의 면적은 약 1,476㎢가 된다. 길이에 비하여 폭이 넓은 편이며, 따라서 유역의 도처에 비옥한 농토가 전개되어 있다.

서쪽으로 청도천(淸道川)이 남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북동쪽에서는 산내천(山內川)·단장천(丹場川)이 남천과 함께 밀양강에 합류하여 군의 중앙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이 밖에도 안법천·초동천·원동천 등이 있다.

기후는 대륙성기후의 특성을 보인다. 연평균 기온은 13.7℃, 1월 평균기온은 1℃, 8월 평균기온은 26.5℃이며, 연강수량은 1,601㎜로 다우지역에 속하는 편이다.(2007년 기준)

지질은 주로 중생대 경상계의 신라통 퇴적암인 혈암과 사암으로 되어 있으나 불국사화강암과 반암도 일부 지역에 분포한다. 식생은 낙엽활엽혼효림대에 속하는 편이나 침엽수림대의 수종을 이룬다.

역사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변진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다. 밀양의 옛 이름은 미리벌로서, 미리미동국이나 추화군(推火郡, 밀벌군)·밀성군(密城郡)이 모두 ‘미리벌’의 한자 표기에서 생긴 지명이다. 낙동강 본·지류의 유역에서 좋은 위치를 차지한 밀양에는 일찍부터 하천과 구릉지대를 따라 군데군데 취락집단이 형성되어 있다가 읍락국가를 형성하였다.

근래에는 밀양댐 공사 중 단장면 고례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영남 내륙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발굴되었다. 서기전 3세기 후반에 읍락국가가 연합해 변진 24국 중의 하나인 미리미동국이라는 ‘소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4세기경 이미 이서국(伊西國: 지금의 청도)을 영역으로 삼고 있던 신라가 낙동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강을 사이에 두고 가야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후 미리미동국은 어느덧 신라의 세력권으로 흡수되면서 신라의 대가야 정벌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그 뒤 신라는 505년(지증왕 6) 밀벌군[推火郡]을 두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군현의 명칭을 고칠 때 밀성군이라 개칭하였다.

고려 초에는 중앙의 권력이 미약하고 지방에 대한 통치체제가 확립되지 못해 대체로 신라의 주군(州郡)을 그대로 두었다. 그리하여 밀양도 신라의 밀성군 그대로 있다가 983년(성종 2)에 비로소 전국을 12목으로 설치하였다. 995년에 전국을 4도호부 10도로 구분할 때 밀양은 경주와 함께 영동도(嶺東道)에 속하였다. 이 때 밀성군을 밀주(密州)로 고쳐 격을 높이고 군수를 자사(刺使)로 개칭하였다.

1018년(현종 9)에 밀주자사는 지밀성군사(知密城郡事)로 개칭되었지만 그 권위는 여전하였다. 1275년(충렬왕 1)에는 군민 조천(趙仟)의 반란사건으로 군을 폐지하고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되어 계림(鷄林 : 지금의 慶州)에 소속되었다. 1285년 군으로 환원되었으나 곧 현으로 강등되었다. 한때 양주(梁州: 지금의 양산)를 폐지하여 밀주에 합쳤으나 1304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밀성군이 공양왕의 증조모 박씨(朴氏)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밀양부로 승격되었다.

1392년(태조 1)에 밀성군으로 환원되었다가, 1394년에 김인포(金仁浦)의 청으로 다시 밀성부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밀성부는 7년 만인 1401년(태종 1)에 밀성군으로 강등되었다. 1415년에 주민의 호수를 기준으로 하여 1천 호 이상의 고을은 모두 도호부로 만들게 했는데, 이때 밀성군이 정식으로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때의 호구수는 밀양대도호부 1,612호 1만1086명, 수산현 93호 678명, 풍각현 294호 1,981명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부사 박진(朴晉)이 병마절도사 이각(李珏)과 함께 동래성(東萊城) 밖의 소산을 지키다가 패하고 후퇴하여, 작원(鵲院: 지금의 삼랑진읍)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1600년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여 부사가 방어사를 겸임했는데, 이 후 1664년(현종 5)까지 60여 년 간 존폐를 거듭하였다. 『밀양부읍지(密陽府邑誌)』에 의하면, 1759년 밀양도호부의 호구수는 1만 49호, 5만 489명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 관제 개정으로 소지역주의를 채택함에 따라 도 이하의 부·목·군·현이 폐지되고 전국이 36군으로 개편될 때 대구부 밀양군이 되었다. 1896년에 경상남도 밀양군으로 개칭되었다. 1904년 경부선이 개통되었으나 지방 유림의 반대로 읍내를 통과하지 못하고 지금의 노선으로 결정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2면을 두었다.

1919년 3·1운동 후에는 김원봉(金元鳳)을 중심으로 한 밀양의 애국청년들이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 1920년 최수봉(崔壽鳳)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는 등의 의거를 하였다. 1931년 4월 1일에는 밀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농산물의 집산지이며 교통의 요지였던 밀양은 해방 이후 경제개발계획에서 소외되었다. 1963년 1월 1일삼랑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66년삼랑진읍 임천(林川)출장소가 설치되었다. 또한 1973년 7월 1일하남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1월 1일밀양읍이 시로 승격되어, 밀양군과 밀양시로 분할되었다. 1995년 1월 1일 도농 통합에 따라 밀양군과 밀양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밀양시가 되었다. 1998년 인구 5,000명 미만 과소동 통합으로 행정동과 용활동을 내일동에 통합함으로서 2개 읍, 9개 면, 5개 동이 되었다.

유물·유적

불교문화재로 단장면 구천리 표충사의 경내에는 표충사삼층석탑(보물, 1968년 지정)·표충사 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이 있다. 그리고 표충사 대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표충사 명부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표충사 팔상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국보, 1962년 지정)이 있다. 그 밖에 교동의 백운사 동종(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이 있다. 또한 내일동의 무봉사석조여래좌상(보물, 1969년 지정), 활성동의 밀양 영원사지 보감국사 묘응탑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영원사지 보감국사 승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등이 있다.

그리고 삼랑진읍 용전리의 만어사삼층석탑(보물, 1968년 지정), 숭진리사지의 밀양숭진리삼층석탑(보물, 1968년 지정), 청도면의 소태리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산내면 남명리의 밀양천황사석불좌상(보물, 1995년 지정)이 있다. 단장면 구천리의 표충사만일루(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가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교동의 밀양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3년 지정), 부북면 후사포리에 예림서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 산외면 다죽리의 혜산서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94년 지정), 단장면 미촌리의 칠탄서원(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무릉리의 자암서당(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93년 지정), 구천리의 표충서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등이 있다. 제대리의 추원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6년 지정), 오례리의 의첨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활성동의 금시당 백곡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96년 지정)가 있다.

그리고 산내면 봉의리의 탁삼재 유물(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93년 지정), 무안면 연상리의 어변당(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이 있다. 정자로는 범도리의 반계정(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95년 지정), 교동의 오연정(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95년 지정)·월연정(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이 있다. 이 외에도 내일동의 천진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아랑각(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이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단장면 고례리유적이 있는데 편년상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한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12기가 남아 있는 하남읍 남전리지석묘군(경상남도 기념물, 1979년 지정)을 비롯해 다음과 같은 지석묘 유적이 있다. 수산리의 지석묘와 패총, 양동리의 지석묘, 활성동의 지석묘군, 삼랑진읍 검세리·용성리의 지석묘군, 부북면 가산리·덕곡리·춘화리의 지석묘, 상동면 금산리의 지석묘, 산외면 금천리의 지석묘, 산내면 송백리의 지석묘, 임고리·가인리의 지석묘, 초동면 봉황리의 지석묘군, 상남면 예림리의 지석묘와 패총 등이 있다.

연상리에 어변당소장고문서(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79년 지정), 부북면 후사포리에는 점필재문집책판 및 이존록(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이 있다. 퇴로리의 이익 성호문집 목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내일동의 노상직 소눌문집 책판 외 20종(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그리고 송운대사분충서난록책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90년 지정)도 이 고장의 중요한 문헌유물이다·

교동과 무안면 무안리의 용호놀이(경상남도 무형문화재, 1991년 지정), 단양면 법흥리의 밀양법흥상원놀이(경상남도 무형문화재, 1993년 지정), 내동의 감내게줄당기기(경상남도 무형문화재, 1983년 지정), 내일동과 내이동의 밀양백중놀이(중요무형문화재, 1980년 지정)가 전한다.

내일동의 추화산성(경상남도 기념물, 1990년 지정)은 퇴뫼성으로서 둘레는 1,430m이다. 동서남쪽에 문지를 두었고 북쪽에 연못과 부속 건물을 배치하였다.

삼랑진읍 검세리의 작원관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는 관문의 부속 건물이다. 누각으로는 내일동의 밀양영남루(보물, 1963년 지정)가 이 고장의 주요 자랑거리이다. 고라리에는 사명대사생가지(경상남도 기념물, 1992년 지정)가 있다.

고가로는 밀양교동손대식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90년 지정), 밀양교동손병순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91년 지정), 밀양교동손병준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91년 지정), 밀양교동손정식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91년 지정), 부북면의 밀양퇴로리이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와 밀양청운리안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단장리의 밀양단장면허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산외면의 밀양다죽리손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등은 주액건축양식에 있어 역사적 의의를 지니는 건축물들이다.

부북면 후사포리의 박양춘여표비각(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93년 지정)이, 무안리에 표충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가 있다.

교동의 삼중대광사도광리군목상(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95년 지정)은 고려 건국공신 손긍훈의 목상으로 좌상에 장검을 들고 있다. 무안면 화봉리에 밀양 조선 성종 왕녀 태실(경상남도 기념물, 1975년 지정), 단장면 구천리에 양국대장사령깃발(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90년 지정), 밀양 표충사 사명대사 일본상륙행렬도 팔곡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90년 지정) 등은 이 지역의 주요 역사 유물이다.

그리고 산내면 남명리의 밀양 남명리 얼음골(천연기념물, 1970년 지정)은 풍혈현상(風穴現象)으로 얼음이 여름에 어는 기현상이 나타나는 곳이며, 하남읍 수산리에는 벼농사를 위한 관개시설로 유명한 수산제수문(경상남도 기념물, 1990년 지정)이 있다. 부북면 위량리에는 밀양 위양못(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7년 지정)이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밀양향교(密陽鄕校)와 여러 서원이 있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김종직의 『여밀양향교제자서(與密陽鄕校諸子書)』에 의하면, 밀양향교는 조선 초기에 설립되었다. 처음의 향교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02년(선조 32)에 부사 최기(崔沂)가 대성전을, 1618년(광해군 10)에 부사 이홍사(李弘嗣)가 명륜당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1821년(순조 21)에 부사 이현시(李玄始)가 중건한 건물들이 있다.

부북면 후사포리의 예림서원은 1567년에 밀양사림에서 김종직을 향사하고 향리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덕성서원(德成書院)으로 건립했다가 1637년 예림서원으로 개칭되었다.

이 밖에 사명당을 주벽으로 한 표충서원을 비롯하여, 삼강서원(三江書院)·광천서원(廣川書院)·혜산서원·칠탄서원·남계서원(南溪書院)·오봉서원(五峰書院)·화남서원(華南書院)·덕남서원(德南書院)·모례서당(慕禮書堂)·다원서당(茶院書堂) 등 서재와 학당이 건립되어 조선 말기까지 문화 진작에 기여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890년(고종 27)부북면 퇴로리에 설립된 석음재(惜陰齋) 서당이 화산의숙(華山義塾)으로 이름을 바꿔 신학문을 교육한 것이 최초이다. 1900년내일동에 사립개창학교가 개교하였다. 화산의숙은 경술국치 뒤 폐쇄되었다가 1920년 사립정진학교로 개건되었다. 이후 1면 1개교 정책에 따라 각 읍면에 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다.

1924년 밀양공립농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1979년 밀양농잠전문대학으로 개편되고 1993년 밀양산업대학교로 개편되었다가 다시 국립밀양대학교로, 그리고 2005년에 부산대학교와 통합하여 부산대학교 밀양캠퍼스로 개편하였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초등학교 21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8개교가 있으며, 부산대학교 밀양캠퍼스가 있다.

문화행사로는 5월에 밀양아랑제와 10월에 밀양예술제, 음력 7월에는 밀양백중놀이 등이 매년 열린다.

민속

밀양은 민속놀이 고장이라 할 만큼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역사성도 깊으며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밀양백중놀이·무안용호놀이·감내게줄당기기·타구놀이 등이 있다.

밀양백중놀이는 논매기가 끝나고, 그 해 농사를 지은 농군, 특히 머슴을 위로해 주던 행사에서 시작되었다. 먼저 백중경에 농신제를 지내고, 놀이마당을 열며 이어서 신풀이로 북춤을 춘다. 이 때 갖가지 흥겨운 춤이 전개되는데, 양반춤·범부춤 등이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짓는 고비에서 기쁨을 나누는 독특한 놀이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무안용호놀이는 음력 정월 보름 전후로 동촌(東村)과 서촌(西村)으로 무안마을이 나누어져 벌이는 풍년기원놀이다. 마지막 날에 큰 줄다리기를 하는데, 무안용호놀이는 그 전날 벌이는 앞놀이로서 일종의 위세다툼놀이라 할 수 있다. 상징적인 대청룡과 대백호를 꾸며 지신밟기를 하면서 한 해의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비는 것이 이 놀이의 목적이다. 이 놀이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감내게줄당기기는 정월 보름날 게 모양의 줄을 만들어 어깨에 걸고 엎드려 서로 당기는 놀이이다. 그 유래는 게[蟹]잡이를 할 때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경상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새터가을굿과 타구놀이를 더 들 수 있다. ‘새터가을굿’은 초동면 신호리, 즉 새터마을 사람들이 추수를 마친 뒤 햇오곡을 커다란 그릇에 담아서 진설하여 서낭고사를 지낸 다음, 공산타작·타작마당·북더기타작·매질통 등 수확노동을 놀이로 재현하고 끝에 굿판을 벌이던 행사이다. 이 놀이는 서낭신에게 추수를 감사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데 의의가 있으며, 동민 화합의 구실을 한다.

타구놀이는 장치기 또는 공치기라고 한다. 추수를 끝낸 뒤 농한기에 논바닥이나 산언덕 잔디밭에서 10여 명씩 두 편으로 나누어 끝이 ㄱ자 모양으로 굽은 공채로 공을 쳐서 상대편 진영으로 넘기는 놀이이다. 이 밖에도 연날리기·널뛰기·돈치기·제기차기·고누두기·공기받기 등 세시적인 아동 놀이는 남아서 행해지고 있으나, 돌싸움[石戰]·줄다리기·횃불싸움 등 대중놀이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동제로는 당산제와 기우제(祈雨祭)를 들 수 있다. 부북면 청운리 당산제를 보면, 해마다 음력 정월 초사흗날 아침에 먼저 마을 유지가 당산의 신수(神樹) 앞에서 대를 잡고, 농악대가 풍물을 울리면 대가 흔들리고 강신을 하게 된다. 그 때 대가 이르는 곳을 따라가서 당도한 집의 주인이 그 해의 제관이 된다. 제관으로 선정된 이는 그 날부터 15일까지 목욕재계하며, 3일 전부터는 하루 세 번씩 목욕재계하고 금기를 엄수하다가, 정월 보름 당산나무에 제를 지낸다. 마을의 평안과 태평·풍년을 기원하면서, 긴 서낭대에 서낭옷을 입힌다고 흰색의 천을 감고 오색 끈을 묶으며, 서낭기를 달아서 당산나무에 세운다. 그리고 정월 열나흘날부터 당산나무, 제관 집, 동네 모든 가정의 문에 금줄을 치고 동제를 지낸다. 이처럼 동제는 대개 당산제라 부르는데, 신체는 거목, 마을수호신을 당산할배 또는 당산할매라고 부른다. 제관을 동회에서 선정하기도 하고 청운리의 경우처럼 신탁에 의해 결정하기도 한다. 제를 지내는 날은 정월 보름이 보편적이나 음력 10월에 지내는 곳도 상당수 있다. 제물은 돼지머리·건명태가 필수적이지만, 마을에 따라서는 건문어·해삼 등의 해산물을 제수로 꼭 쓰는 경우도 있다. 비정기적인 행사로서 가뭄이 들었을 때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기우제는 샘 또는 소(沼)에서 지내는데, 산내면 삼양리에 있는 시례 호박소와 용두연, 부북면 화악산 중턱 우주암 옆에 있는 샘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제물은 비슷하나 반드시 산돼지의 피를 쓴다.

설화·민요

이 고장에 전해지는 설화는 인물 전설, 지명유래담, 기암전설 등으로 크게 구별할 수 있다. 인물 전설은 변계량·김종직·임유정(任惟政)·박곤(朴坤)에 관한 것이 있다. 변계량의 일화로는 다른 사람과 혼인한 처녀가 변계량의 인품과 벼슬에 반해 그 남편을 죽이고 변계량과 다시 혼인하여 세 자식을 낳고 살았는데, 뒤에 이 사실을 안 변계량이 그녀와 세 아들을 죽이고 「여자개가금지법」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김종직의 일화는 다음과 같다. 김종직이 태어나자 마을 앞 시냇물의 맛이 사흘 동안 매우 달아 내 이름을 감천(甘川)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어릴 때 짐승의 말소리를 알아들었다고 한다. 한편 죽을 때 유언으로 자기 관의 길이를 보통 관보다 한 자 길게 만들라고 후손에게 당부하여, 유언대로 관을 만들어 장사를 지냈다. 그 뒤 무오사화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할 때 관만 끊기고 시체는 손상을 입지 않았으며, 이장을 할 때 보니 비록 시체지만 머리카락·손톱·발톱 등이 자라서 자신의 무죄를 무언으로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임유정에 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후처가 종을 시켜 전처 소생인 장남을 장가 든 첫날밤에 죽였는데 이 사실을 탐지한 며느리가 자살하였다. 이에 임유정은 후처와 후처 소생을 집에 가두어 불을 질러 타죽게 하고 진사였던 자신은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뒷날 임유정은 이름보다 호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가 곧 사명당(四溟堂)이다. 유정은 어느 날 휴정(休靜)과 추어탕을 먹은 뒤 승려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먹은 것을 모두 토하기로 하였다. 휴정은 산 미꾸라지를 토하였으나, 상좌로 있던 유정은 송어새끼 같은 물고기를 토하였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유정이 열심히 수도하여 뒷날 훌륭한 고승이 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송어새끼 같은 물고기는 중의 턱에서 나왔다고 하여 중텍이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표충사 뜰에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라서 모과나무가 되었고, 철화방(鐵火房) 뜨거운 곳에서 ‘雪(설)’자를 크게 써 놓고 떨고 있었다는 이야기,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에 강화사(講和使)로 가서 왜인들을 감복시켰다는 일화가 즐겨 이야기되고 있다. 박곤에 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박곤은 어릴 때 집안이 가난해 집안 빈 터에 못을 파고 이 곳에 물고기를 길러 홀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그는 이 연못에서 물고기가 용으로 승천할 때 남겨 놓은 한 쌍의 비늘로 말다래를 만들어 타고 싸움터에 나가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 어느 이른 봄날 남천에 물고기를 잡으러 갔을 때 자라 한 마리가 황금빛 찬란한 물고기를 물어뜯고 있는 것을 보고 작살로 자라를 내리꽂아 물고기를 살려 주웠다. 물고기를 자기 집 연못에 가져다 길렀더니 어느 날 용이 되어 승천하면서 비늘을 남겨 놓아 이 비늘 덕택으로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싸울 때마다 승리했다고 한다. 뒷날 명나라까지 그 이름이 알려져 명나라에 초대되어 황제 앞에서 그 곳 장수들과 무예를 겨루어 크게 이겼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자객이 밤에 몰래 그를 죽이려 했으나, 하늘에서 용이 불벼락을 내려 자객이 죽었다. 이 용은 전에 박곤이 구해 준 물고기였다. 이 일 때문에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미녀까지 받아 뒤에 아들 삼형제를 낳았다. 아들들 역시 재주가 뛰어난 무인이어서 후세 사람들이 장종삼걸(將種三傑)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사신(邪神)을 모신 사당을 불지르는 등 대담한 행동을 보여준 「손병사 어머니전설」, 야욕에 찬 통인의 손에 남몰래 피살된 「아랑전설」 등이 있다. 지명전설로는 임진왜란 때 한 마을에서 충신·효자·열녀 등이 두루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지어진 「삼강문(三綱門)과 삼강동유래(三綱洞由來) 전설」이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산길을 가다가 술에 취해 잠자는 주인에게 다가오는 불길을 개가 온 몸에 물을 묻혀 와 꺼서 주인을 구하고는 자신은 죽었다는 「개고개 전설」이 전해진다.

또한, 신라왕이 죽어 동해 용이 되어 왜적의 본거지인 섬을 없애고 날아와 미륵불이 되고 그 때 따라온 고기들이 돌이 되었다는 「만어산전설(萬魚山傳說)」이 있다. 이 밖에 기암(奇巖)에 얽힌 이야기로, 안씨 집안을 지켜준다는 「치마바위전설」, 종의 시샘으로 죽은 처녀의 원혼을 달래주듯 하늘이 종을 징계했다는 「우릉바위전설」, 바위를 깨니 조개가 나오고 그 일이 있은 뒤로 마을이 부흥했다는 「조개바위전설」, 불효자식이 벼락을 맞아 죽은 뒤 바위로 변했다는 「벼락바위전설」 등이 전한다.

이 고장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는 종류가 다양하고 양도 풍부하다. 이는 북부 고산지역과 남부 평야지역이 있어 산간촌과 평야촌의 노동요가 함께 전승되고, 예로부터 경상남도 동북부의 중심적인 고을 밀양에 음악성이 높은 비기능요가 발달해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밀양아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3음보 2행의 가사 뒤에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라는 후렴이 붙어서 연을 이어가는 음악성이 높은 유명한 민요이다. 「고사리타령」은 나물을 캘 때 부르는 노래로, 여러 사람이 놀 때는 「쾌지나 칭칭나네」의 가사로 고쳐 부르기도 한다. 이 노래는 옛날에 남도령과 서처자가 산에서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은 뒤, 서처자가 살림을 잘한다는 소문이 저승까지 퍼져 아기를 둔 채 저승사자에게 잡혀간다는 내용을 서사적으로 표현한 민요이다. 이와 같은 유(類)의 민요는 북부 산간촌에서 많이 전승되며, 「시집살이노래」·「애운애기」·「민경춘노래」 등이 있다.

달마다 해먹는 떡이나 범벅을 월령체(月令體)로 부르는 「떡타령」과 「범벅타령」, 지방색이 잘 나타나 있는 「밀양수산다리」·「무안노래」 등은 다른 고장에서는 듣기 어려운 독특한 민요이다. 이 밖에도 「삼삼기노래」·「베틀노래」·「바느질타령」·「줌치노래」·「알강달강」 등 여성들의 부요(婦謠)가 많이 전한다. 「모심기노래」·「논매기노래」·「방아타령」·「망깨노래」 등의 노동요도 다른 지방에 비해 가사가 매우 풍부하게 발달한 점이 밀양지방 민요의 특색이다.

산업·교통

밀양시는 경상남도 전체 면적의 7.6%에 해당하며, 임야가 전체면적의 65,6%를 차지하고 경지면적이 18.6%, 주거용지가 1.9%, 기타 10.7%로 구성되는 토지이용상태를 나타낸다.

밀양시의 경지 면적은 경지면적 148.44㎢으로 경남에서 가장 넓고 전체 토지이용면적의 21.6%에 달한다. 이중 논이 120.24㎢, 밭이 48.98㎢이다. 논이 전체경지면적의 81%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답작지역이다. 논농사는 주로 낙동강 및 밀양강 유역의 하안평야지대와 산골짜기의 분지지구에서 이뤄진다. 2008년 현재 농가호수는 1만 2,223호, 농가인구는 3만 1,551명으로 전체 시 인구에 대한 농가인구 비율은 28.3%에 달한다. 농업장려를 위한 농업진흥지역 1만 005ha와 농업보호구역 733.3ha가 지정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밀·콩·고구마 등의 곡물류와 무·배추·상추·고추·딸기·수박 등의 채소류 및 포도·배·복숭아·감·밤·대추 등의 과수작물 등의 재배가 활발하다. 부산 및 대구 등 대소비지로 공급하는 원예농업적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 축산물로는 한우·돼지·닭·산양 등의 사육이 농가의 부업으로 이뤄지고 있다.

한편, 내수면을 이용한 양식업도 행해져 산외면의 내수면개발시험장에서는 민물고기 보호 및 양식에 힘쓰고 있다. 이 곳에서는 자라·쏘가리·민물새우 등 특수 어종의 양식과 보급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광업은 금속광 12개와 비금속광 19개의 총 31광구가 있으나 3곳만 가동 중에 있으며 나머지는 활동이 중단된 상태이다. 납석과 고령토가 약간씩 생산된다.

밀양시의 총 사업체수는 2008년 현재 7,735개 업체이며 종사자수는 2만 8,019명이다. 농업 및 임업 관련으로는 15개 업체에 358명이 종사하고 있다. 어업관련 업체는 전무한 상태이며 광업은 3개 업체에 21명이 고용되어 있다. 2차 산업에 해당하는 제조업체는 모두 623개 업체로서 5,341명이 일하고 있다. 음식료품제조업, 섬유제품제조업, 비금속광물제조업의 비중이 크다.

산업 대분류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업종은 밀양시의 경우 서비스업이다. 총 7,094업체에 2만 2,299명이 고용되어 있다. 서비스업의 비중은 제조업의 10배 이상에 달한다. 도·소매업 및 소비자용품수리업이 서비스업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3,105업체에 6,192명이 일하고 있다. 다음으로 숙박 및 음식점업, 기타 공구수리 및 개인서비스업의 비중이 크다. 밀양시에는 하남농공단지, 초동특별농공단지, 부부특별농공단지, 상남특별농공단지 등이 4개 산업 및 농공단지에 63개 업체가 입주하고 있으며 종업원 수는 2,301명이다.

교통은 부선 철도가 시의 동북부를 남북으로 관통하고 국도 24, 25호선이 시의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으며 인근 대도시인 창원, 울산(77.1km), 부산(79.1km), 대구(85.4km), 창녕(39.3km)을 연결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진영·창원·청도·경산·대구를 연결하는 국도 25·25호선이 중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고 언양·울산·창녕을 연결하는 국도가 동서로 통과하며 지방도가 시·군내 각 지역은 물론 양산·김해·경주를 연결한다. 대구∼부산 간 고속도로가 중앙부를 남북으로 통과한다. 경부선과 경전선을 연결하는 철도의 요충지로서 경부선이 중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여 매우 편리한 교통 요건을 갖추고 있다.

관광

이곳은 삼한시대부터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고적과 명승지가 많아 예로부터 영남의 관광지로 이름난 곳이다. 밀양팔경을 비롯하여,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삼대 누각의 하나인 영남루와 아랑사, 단군 및 고구려·신라·고려·조선 등 8왕조의 시조 위패를 모신 천진궁이 있다. 영남루 부근의 풍경은 조선 16경의 하나로 알려져 왔으며 남쪽을 바라보면 밀양 8경과 10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영남루 뜰 동편에는 일제에 항거한 향토출신 독립열사를 기리는 독립의열사 중모비가 있다

그리고 고찰인 표충사를 비롯한 46개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고 '밀양팔경' 외에 표충사 주변의 층층폭포·무지개폭포·구천계곡, 산내면 삼양리의 시례호박소, 내일동의 영남루 아래에 있는 석화(石花), 밀양향교, 백운사의 범종(梵鐘)이 유명하다.

이 밖에 밀양강변 월연정 언덕에 있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두 그루의 흰소나무가 있다. 또한 삼복더위에 얼음이 어는 산내면 남명리 얼음골 등이 있다. 이렇듯 관광자원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한데다 숙박시설도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삼랑진의 송지장과 하남의 수산장이 매우 번성하였고, 그 거래 규모도 컸다. 현재는 삼랑진읍의 송지장과 청도면 구기장이 4·9일, 산내면의 송백장이 5·10일, 무안면 무안장이 1·6일에 열린다. 주요 거래 품목은 채소·산나물·마늘·고추, 그리고 조개류·어류와 사과 등의 과일이다.

밀양아리랑 대축제는 매년 음력 4월 16일 이전에 길일을 택하여 4일간 개최하는 종합민속축제로서 사명대사의 충의정신, 김종직 선생의 지덕정신, 아랑낭자의 정순정신을 기린다. 남천강변 야외공연장 등 시일원에서 진행된다. 매년 10월에 열리는 밀양예술제는 전통문화예술 계승발전과 지역예술 활성화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추화산봉수대에서 열리는 추화산성 봉수제는 밀양 최초의 도읍지인 추화산성을 개발하여 갑오경장)으로 중단된 봉수대 봉화 올리기 행사의 일환으로 매년 재현되고 있다.

밀양시 내일동에 있는 밀양시립박물관은 1973년 사명대사(四溟大師)의 기념관으로 건립되었다가 1993년 밀양시립박물관으로 지정 등록하였다. 소장 유물은 5,000여 점으로 주로 문집의 책판과 서화 종류가 주종을 이룬다.

스포츠 시설로는 종합경기장 2개소, 실내체육관 1개소, 테니스장 3개소, 그리고 수영장 1개소가 있다.

읍·면
  1. 삼랑진읍(三浪津邑)

시의 남부에 위치한 읍. 면적 78.28㎢, 인구 5,752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송지리이다. 본래 밀양군 지역으로 하동면(下東面)이라 하여 임천(林川)·숭진(崇眞) 등 12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해군 생림면의 도요리 일부와 양산군 하서면의 내포리 일부를 병합하였다. 1918년삼랑면으로 개칭되고, 1963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대부분이 산지로서, 만어산·천태산(天台山, 632m)·금오산(金烏山)이 북부와 동부의 면 경계지역에 솟아 있다. 서부에서 밀양강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삼랑리 부근에서 낙동강과 만난다.

평야는 이들 강 유역인 서북부와 남부에 소규모로 분포해 있다. 주산업은 산지를 이용한 과일 재배로 배·복숭아가 주종을 이루며, 최근에는 딸기 재배도 활발하다. 평야지대에서는 비닐하우스를 이용해 채소를 재배하며 소·돼지·닭 등 가축을 사육하고 있다. 경부선 철도가 읍의 서남부를 지나며, 송지에서 경전선이 갈라져 철도 교통은 편리하다. 도로는 양산·밀양·김해로 연결되는 지방도가 있다. 옛날에는 밀양강과 낙동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했으나 철도가 개통된 이후 쇠퇴해졌다.

문화유적은 용전리 도요지·만어사 삼층석탑, 검세리 작원관지, 안태리 부암(父庵), 숭진리에 삼층석탑과 왕이 만어사에 불공을 하러 갈 때 쉬었다는 왕당이 있다. 송지(松旨)·용전(龍田)·미전(美田)·삼랑(三浪)·율동(栗洞)·우곡(牛谷)·검세(儉世)·안태(安台)·행곡(杏谷)·임천(林川)·숭진(崇眞)·청학(靑鶴)·용성(龍星) 등 13개 리와 54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1. 하남읍(下南邑)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읍. 면적 36.87㎢, 인구 8,05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수산리이다. 본래 수산현 지역으로 고려 현종 때 밀양부에 병합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밀양의 남쪽에 있어 하남면이라 하여 명례(明禮)·백산(柏山)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서초동면(上西初同面)의 일부를 병합해 1973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북부는 밀양강이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하고, 남부에는 낙동강이 동쪽으로 흐르면서 동서로 길고 넓은 하남평야(下南平野)를 펼쳐 놓았다.

넓은 평야가 분포해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감자·봄무와 그 밖에 채소류 및 사과·배·복숭아 등이 생산된다. 최근에는 단감나무단지가 조성되어 많은 양의 단감이 생산된다. 돼지·닭 등의 가축 사육과 양잠도 활발하여 누에고치 생산량이 많다.

도로는 대구∼부산간의 국도가 읍의 중앙을 통과하며, 밀양∼창녕으로 연결되는 지방도가 면의 남부를 지나고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남전리에 고인돌군, 대사리에 봉선사지(奉先寺址), 양동리에 신라의 임금이 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를 지냈다는 풍류현(風流峴), 파서리에 파서막(破西幕)과 정남정(定南亭)이 있다.

수산(守山)·명례(明禮)·백산(柏山)·파서(巴西)·남전(南田)·대사(大司)·양동(良洞)·귀명(貴明) 등 8개 리와 40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1. 단장면(丹場面)

시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42.09㎢, 인구 4,318명(2015년 현재). 면소재지는 태룡리이다. 본래 밀양군 지역으로 중이동면(中二同面)이라 하여 사연(泗淵)·국전(菊田) 등 12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양산군 하서면 일부를 병합하여 면 소재지인 단장리의 이름을 따서 단장면이 되었다. 면 북부에는 천황산·정각산·승학산이 솟아 있고, 동부에는 재약산·향로봉(香爐峰, 727m), 남부에는 금오산·만어산·칠탄산이 솟아 있어 면 전체가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산지 사이를 남천이 서쪽으로 흘러 서쪽 면 경계를 흐르는 단장천에 합류한다. 단장천 유역에는 좁고 긴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산지가 많아 밭농사 중심의 농업을 주로 한다. 그러나 보리·밀·감자 등의 산출은 적은 편이며, 대추·표고버섯·풋고추·약초·산나물이 많이 생산된다. 소·돼지 등 가축의 사육도 활발하다. 특히, 표고버섯은 기업적으로 재배하여 수출도 하고 있어 농가의 큰 소득원이 되고 있다.

교통은 표충사에서 단장까지 면의 중앙을 동서로 지나는 지방도가 울산∼밀양간의 국도에 연결되어 있을 뿐이어서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구천리에 표충서원·표충사가 있다. 표충사 경내에는 청동함은향완·삼층석탑·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석등 등이 있다. 또한, 미촌리에 칠탄서원, 고례리의 백마산에는 백마산성이 있다. 농암대(籠巖臺)는 김종직이 만년에 유상하던 곳으로 수석이 빼어난 경승지이다.

태룡(台龍)·단장(丹場)·미촌(美村)·안법(安法)·법흥(法興)·감물(甘勿)·국전(菊田)·무릉(武陵)·사연(泗淵)·범도(泛棹)·고례(古禮)·구천(九川) 등 12개 리와 40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1. 무안면(武安面)

시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100.37㎢, 인구 5,55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무안리이다. 본래 밀양군 지역으로 하서면(下西面)과 상서이동면(上西二洞面)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하서면은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일부를 병합했으며, 상서이동면은 영산군(靈山郡) 부곡면 일부를 병합하여 관할하였다. 1933년 이들 두 면이 병합해 무안의 이름을 따서 무안면이 되었다. 의봉산·영취산·종암산·덕암산 등이 면 전체를 둘러싸 대부분의 지역이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면의 중앙을 청도천이 남쪽으로 흘러 산간 분지가 길게 형성되었다.

주요 산업은 밭농사로 보리·콩 등의 농작물이 생산되고 양파·풋고추·토마토·채소 등을 재배한다. 그러나 산지가 많아 농산물 생산량은 많지 않다. 한편, 소·돼지·닭 등 가축 사육이 활발하다. 교통은 함양∼울산 간의 국도가 면 북부를 지나며, 지방도가 잘 연결되어 있어 매우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무안리에 표충비, 연상리에 안수사지(安水寺址)·어변당, 화봉리에 선화17년왕녀태실, 삼태리·연상리·내진리에 고인돌군이 있다. 동족마을로는 내진리에 벽진이씨, 중산리에 평산신씨가 있다.

무안(武安)·신법(新法)·삼태(三台)·화봉(華封)·죽월(竹月)·양효(良孝)·내진(來進)·동산(銅山)·판곡(板谷)·운정(雲汀)·마흘(馬屹)·정곡(鼎谷)·연상(淵上)·성덕(城德)·모로(慕老)·덕암(德巖)·중산(中山)·웅동(熊洞)·가례(佳禮)·고라(古羅) 등 20개 리와 68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1. 부북면(府北面)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5.31㎢, 인구 5,96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운전리이다. 본래 밀양부 지역으로 밀양부의 북쪽이어서 부북면이라 하며 전사포·후사포 등 1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6개 리가 되었다. 북쪽에는 형제봉(兄弟峰)·돗대산(452m), 서쪽에는 종남산이 있어 산지를 이룬다. 이들 산지 사이를 밀양강의 지류인 감내를 비롯한 소하천들이 동남류하면서 유역에 비교적 넓은 산간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경지율이 높은 편이어서 벼농사를 주로 지으며, 맥류와 딸기·풋고추·은행 등도 생산된다. 그리고 소·닭 등의 가축도 사육한다. 교통은 밀양∼청도 간의 국도가 면 가운데를 동서로 지나고 면 내에 지방도가 연결되어 있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으로 후사포리에 예림서원이 있는데, 이 곳에 점필재문집책판 및 이존록이 있다. 퇴로리에는 성허선생문집책판이 장판각에 보존되어 있고, 전사포리의 모렴당(慕濂堂)에는 성호선생전집책판이 있다. 퇴로리에는 조개무지, 후사포리·제대리·덕곡리·춘화리·청운리 등 여러 곳에 고인돌군이 있다. 가산리에는 가야시대 것으로 추측되는 산성이 있다. 동족마을로는 후사포리에 밀양박씨, 퇴로리에 여주이씨가 있다.

운전(雲田)·전사포(前沙浦)·후사포(後沙浦)·제대(堤大)·감천(甘川)·오례(五禮)·덕곡(德谷)·청운(靑雲)·가산(佳山)·대항(大項)·퇴로(退老)·월산(月山)·위량(位良)·무연(舞鳶)·춘화(春化)·용지(龍池) 등 16개 리와 51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1. 산내면(山內面)

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이다. 면적은 107.49㎢이며, 인구는 3,941명(2015년 현재)이다. 면 소재지는 송백리이다. 본래 밀양군 지역으로 중초동면(中初同面)이라고 하였다. 1908년에는 천화산 안쪽이므로 천화산내면(穿火山內面)으로 고쳐 용전·임고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8년에는 산내면으로 개칭되었다. 면 북부에는 구만산·억산(億山, 944m)·운문산 등이 있고 서부에는 용암봉, 동부에는 천황산, 남부에는 정각산 등 높은 산들이 면 전체를 둘러싸고 있어 대부분 지역이 험준한 산지를 이룬다. 이들 산지 사이를 산내천이 남서류하면서 유역에 좁은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보리·콩·팥·풋고추·딸기·밤·대추가 많이 생산된다. 초지가 많아 목축업이 성하고 특히 흑염소가 많이 사육된다. 교통은 울산∼창녕 간 국도가 하천을 따라 면 중앙을 통과하고 있을 뿐이어서 불편하다.

문화유적으로 남명리에 얼음골·백운암이 있다. 그 밑의 호박소는 나라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었다. 얼음골은 여름에 얼음이 얼고, 겨울에는 물이 따뜻해지는 이상기온지대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송백리에는 미륵사지(彌勒寺地)가 있으며, 송백리·가인리·임고리에는 고인돌군이 있다.

송백(松栢)·봉의(鳳儀)·용전(龍田)·임고(臨皐)·가인(佳人)·원서(院西)·삼양(三陽)·남명(南明) 등 8개 리와 52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1. 산외면(山外面)

시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은 35.41㎢, 인구 2,94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다죽리이다. 본래 밀양군 지역으로 중삼동면(中三同面)이라고 하였다. 1908년에 천화산의 바깥쪽이 된다 하여 천화산외면(穿火山外面)으로 고쳐 남기·엄광 등 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외면으로 개칭되었다. 면의 북부에 중산(中山, 641m)이 있으며, 용암산·화지산(花枝山)·비학산(飛鶴山) 등이 곳곳에 있어 대부분 지역이 산지로 이루어졌다. 동쪽 끝에는 단장천이, 서쪽 끝에는 엄담천(嚴南川)이 남쪽으로 흘러 밀양강에 합류하며, 유역에 좁은 평야가 전개된다. 평지가 적어 밭농사를 주로 짓는데,

주요 농산물로 보리·콩·감자·사과·옥수수·고추 등이 생산된다. 가축으로 소·닭 등을 사육한다. 교통은 울산∼창녕 간 국도가 면의 서남부를 지나고 있을 뿐이어서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엄광리에 엄광사지(嚴光寺地), 금곡리에 백룡사·청룡사와 봉성사지(奉聖寺地), 다죽리에 혜산서원이 있다.

다죽(茶竹)·금곡(金谷)·희곡(希谷)·금천(琴川)·남기(南沂)·엄광(嚴光) 등 6개 리와 24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1. 상남면(上南面)

시의 중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은 56.05㎢, 인구 9,75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기산리이다. 본래 밀양군 지역으로 밀양읍 내 남쪽이 되므로 상남면이라 하여 예림(禮林)·운내(雲內)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내면 가곡리의 일부, 남포리의 일부, 하동면(河東面)의 용성리 일부 등을 병합하였다. 면의 서쪽 경계에 종남산과 덕대산이 남북으로 뻗어 있어 서부는 산지를 이루고, 동쪽은 밀양강이 남류하여 낙동강에 이른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밀양강과 낙동강을 사이에 두어 수리시설과 경지 정리가 잘 된 밀양평야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콩 등이 생산되며, 비닐하우스를 이용해 딸기를 재배한다. 소·돼지·닭 등의 사육도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양잠업이 성해 누에고치가 생산된다. 특히, 예림리는 한약재인 맥문동의 특산지로 유명하다. 교통은 마산∼청도 간 국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예림리에 조개무지·고인돌군·고분, 기산리에 고인돌군이 있다.

기산(岐山)·연금(淵今)·예림(禮林)·평촌(平村)·마산(馬山)·동산(東山)·외산(外山)·조음(棗音)·남산(南山) 등 9개 리가 있다.

  1. 상동면(上東面)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은 52.00㎢, 인구는 3,08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금산리이다. 본래 밀양군 지역으로 상동면이라 하여 옥산(玉山)·고정(高亭) 등 8개 이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상북도 청도군 하남면 일부를 병합하여 18개 리가 되었다. 북부에 철마산, 동부에는 용암봉(龍巖峰, 686m)·중산(中山, 641m) 등 대부분 산간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밀양강이 서부에서 남쪽으로 흐르면서 유역에 소규모의 평야가 전개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를 비롯하여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풋고추·딸기, 그리고 감 등이 생산된다. 이 곳의 감은 당도가 높아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가축으로는 소·닭이 많이 사육되며, 밀양강에서는 은어·잉어가 잡힌다. 교통으로는 경부선 철도가 면의 서부를 남북으로 통과한다. 또한 김해∼청도 간 국도가 이와 함께 달리고, 동부로는 지방도가 연결되어 있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옥산리에 철마산성, 금산리에 봉수대가 있다. 동족마을로 가곡리에 밀양박씨가 있다.

금산(金山)·가곡(佳谷)·안인(安仁)·옥산(玉山)·고정(高亭)·도곡(道谷)·매화(梅花)·신곡(新谷) 등 8개 리와 25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1. 청도면(淸道面)

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은 57.44㎢, 인구 1,87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구기리이다. 본래 경상북도 청도군 지역으로 외서면(外西面)이라 하여 인산(仁山)·소고(所古) 등 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밀양군에 편입되었으며, 하서면 일부를 병합하고 청도면으로 개칭되었다. 주위에는 호암산(虎巖山, 612m)·화악산·열왕산(烈旺山, 663m)·의봉산(儀鳳山)·형제봉 등의 높은 산들이 면을 둘러싸고 있어 면 전체가 산지이다. 이들 산지 사이를 청도천이 서남류하면서 유역에 소규모의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산지가 많은 관계로 보리·콩 등의 밭농사가 주된 산업이며, 고추·양파와 감이 많이 생산된다. 특히, 이 곳의 감은 반시라 하여 열매가 굵고 당도가 높아 특산물로 유명하다. 교통은 울산∼청도 간 국도가 면의 중앙을 동서로 통과할 뿐이어서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소태리에 고분군·천주사지(天柱寺址)·구천사지(九千寺址)와 오층석탑이 있으며, 두곡리에 선사유적지, 인산리에 고인돌군이 있다.

구기(九奇)·소태(小台)·두곡(杜谷)·조천(槽川)·인산(仁山)·고법(古法)·요고(要古) 등 7개 리와 45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1. 초동면(初同面)

시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은 48.46㎢, 인구 3,52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오방리이다. 본래 밀양군 지역으로 상서초동면(上西初同面)이라 하여 와지(臥旨)·봉황(鳳凰) 등 15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월·덕산 등 12개 리로 개편되었으며, 1918년초동면으로 개칭되었다. 면 서부에는 종남산·덕대산(德大山, 630m)이 있고, 북부와 동부도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면 가운데를 봉황천(鳳凰川)이 남류하여 남부의 면계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이들 강 유역에는 길게 하안평야가 전개된다. 그리고 신호리에는 초동지(初同池)가 있어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평지가 넓은 편이어서 벼농사를 많이 짓는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감자 등이다. 또한, 구릉지를 중심으로 단감나무 단지가 조성되어 단감이 많이 생산된다. 그리고 소·닭 등 가축의 사육도 활발하다. 교통은 창녕∼김해 간 국도가 면을 동서로 통과하며, 면을 남북으로 잇는 작은 지방도가 있을 뿐이어서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신호리에 변계량비각(卞季良碑閣)과 고인돌군, 범평리와 봉황리에 고인돌군, 검암리에 이궁대(離宮臺), 성만리에 우창주정려각(禹昌柱旌閭閣), 덕대산(德大山)에 산성이 있다. 동족마을로는 오방리에 창녕조씨, 신호리에 밀양박씨가 있다.

오방(五方)·범평(帆平)·명성(明星)·대곡(大谷)·반월(半月)·검암(儉巖)·금포(金浦)·성만(星萬)·신호(新湖)·신월(新月)·덕산(德山)·봉황(鳳凰) 등 12개 리와 52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밀양시통계연보』(밀양시, 2008)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밀양지』(밀양지편찬위원회, 1992)
『한국구비문학대계·밀양군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6)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미리벌의 얼』(밀양군, 1983)
『경상남도지』(경상남도지편찬위원회, 1977)
밀양시(www.miryang.go.kr)
집필자
배미애|이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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