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창

  • 역사
  • 인물
  • 조선 전기
조선 전기에, 감찰, 김포현령, 파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이칭천령군(天嶺君)
인물/전통 인물
  • 관련 사건중종반정
  • 본관함양(咸陽)
  • 사망 연도미상
  • 성별남성
  • 주요 관직감찰|김포현령|목사
  • 출생 연도미상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정만조 (국민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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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감찰, 김포현령, 파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함양(咸陽). 아버지는 전한(典翰) 박휘(朴輝)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03년(연산군 9) 감찰(監察)로 있을 때 후사 없이 죽은 종친의 노비를 계후(繼後)한 이에게 상속했다가 증손대에 이르러 관(官)으로 귀속시키는 것에 반대 의견을 피력하였다. 1505년 김포현령(金浦縣令) 재직 중 파직되었는데, 이는 국왕의 추문이 내관(內官)을 통해 밖으로 알려질 것을 염려한 연산군이 박영창 등 내관의 족친(族親)인 관료들을 모두 파직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중종반정이 일어남에 반정주동자의 한 사람이던 동생 박영문(朴永文)의 권유에 따라 반정군(反正軍)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천령군(天嶺君)에 책봉되어 관직이 목사(牧使)에까지 이르렀다.

1513년(중종 8) 동생 박영문이 역모에 관련되어 죽음을 당하자 여기에 연좌, 중죄인으로 몰려 훈적(勳籍: 공훈자의 공식기록)에서 삭제되어 유배되었다. 1522년 아들 생원 박유(朴瑜)의 호소로 죄가 풀려 났으며, 왕이 공신녹권(功臣錄券)까지 환급하고자 하였으나 대간(臺諫)의 반대로 삭훈(削勳: 공훈의 삭제)은 회복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 『중종실록(中宗實錄)』

  •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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