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양(咸陽). 아버지는 전한(典翰) 박휘(朴輝)이다.
1503년(연산군 9) 감찰(監察)로 있을 때 후사 없이 죽은 종친의 노비를 계후(繼後)한 이에게 상속했다가 증손대에 이르러 관(官)으로 귀속시키는 것에 반대 의견을 피력하였다. 1505년 김포현령(金浦縣令) 재직 중 파직되었는데, 이는 국왕의 추문이 내관(內官)을 통해 밖으로 알려질 것을 염려한 연산군이 박영창 등 내관의 족친(族親)인 관료들을 모두 파직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중종반정이 일어남에 반정주동자의 한 사람이던 동생 박영문(朴永文)의 권유에 따라 반정군(反正軍)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천령군(天嶺君)에 책봉되어 관직이 목사(牧使)에까지 이르렀다.
1513년(중종 8) 동생 박영문이 역모에 관련되어 죽음을 당하자 여기에 연좌, 중죄인으로 몰려 훈적(勳籍: 공훈자의 공식기록)에서 삭제되어 유배되었다. 1522년 아들 생원 박유(朴瑜)의 호소로 죄가 풀려 났으며, 왕이 공신녹권(功臣錄券)까지 환급하고자 하였으나 대간(臺諫)의 반대로 삭훈(削勳: 공훈의 삭제)은 회복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