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치량(稚亮). 예조판서 박주수(朴周壽)의 아들이다.
1856년(철종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858년 병조정랑·호조참의, 1860년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고종조에도 중용되어 대원군 집권기에는 병조참판·안악군수(安岳郡守)·영변부사(寧邊府使)·이조참판·한성부판윤·예조판서·형조판서, 민씨정권하에서는 경상감사(慶尙監司)·이조판서·상호군(上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감사로 재임시인 1875∼1876년은 영남일대가 연이은 흉년을 맞아 굶주려 죽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이같은 도내의 민정(民情)을 의정부에 장계로 보고해서 재해가 심한 읍면의 사창곡(社倉穀) 납부를 이듬해 가을까지 연기시키고 2,000결을 면세지로 책정받는 동시에 부민(富民)의 빈민구제를 권장하는 등 진휼대책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