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문재(文哉). 호는 오서(梧西). 간성군수(杆城郡守) 박제갑(朴齊甲)의 아들이다.
1873년(고종 10)에 경과정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이듬해 홍문관부수찬을 지냈다.
1875년 8월 왕세자 이척(李坧: 순종)의 책봉을 위한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 이유원(李裕元), 부사 김시연(金始淵)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성균관대사성·대사간·이조참의·좌승지·이조참판·사헌부대사헌을 역임하였다.
대사간 재임때인 1881년에는 개화정치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영남 유학 이만손(李晩孫)을 엄형에 처하라는 주장을 양사(兩司)가 함께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좌승지로 재임하면서 김옥균(金玉均) 등 정변의 주모자를 엄형에 처해야 한다는 원의(院議)를 고종에게 아뢰고 정변 직후 종묘(宗廟)·경모궁(景慕宮) 등을 봉심(奉審: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능이나 廟宇를 보살핌)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