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효천(孝天), 호는 소송(小松). 한성부판윤 겸 경연특진관 백남익(白南益)의 아들이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고종 19) 남항선전관(南行宣傳官)으로 관로에 올랐다. 같은 해 무과에 급제한 뒤 승진을 거듭해 승선(承宣)·철산부사(鐵山府使)·내금위장(內禁衛將)·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경상좌도병마절도사·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에는 갑오개혁 때 제정된 육군계급제도에 따라 참장(參將)에 임명된 뒤 군부협판·갑산부관찰사(甲山府觀察使)·평리원검사(平理院檢事)·평리원재판장 및 군법기초위원을 지냈다.
독립협회 활동시에는 간사부에 소속되어 활약한 개화파 무관의 한 사람이었으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신식 군제 설치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개편으로 인해 군정의 문란함이 극도에 달하자 1900년에는 군정교구(軍政矯捄)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받아들여 고종이 원수부(元帥府)에 실시토록 하여 일련의 군제 정비가 이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육군법률 317조가 1900년 9월 제정되면서 육군법원이 설치되는 등 군사법제도가 완비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한 이후 육군법원장·원수부군무국총장·기록국총장·검사국총장·평안북도관찰사·교육부참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04년 말에는 경무사(警務使)를 겸하고 있던 중 일제침략에 저항하는 상민배(商民輩)를 탄압하지 않았다고 하여 해임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강제 체결 때에는 민영환(閔泳煥)과 함께 극간(極諫)하였으나 대세의 흐름이 돌이키기 어려운 것을 깨닫고 수원(水原)으로 은퇴해 여생을 보냈다.